포란(抱卵)의 계절 [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입력 2023-02-24 17:38   수정 2023-04-26 12:20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가 있다면 ‘포란(抱卵)’이다. 동물이 알을 품는 행위를 뜻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봄과 나란히 둔다. 땅도 포란을 한다. 날이 따뜻해져서 얼음이 녹는 게 아니라 땅이 얼음을 알처럼 품은 시간 때문이리라. 봄이 오면 냉이부터 캐던 할머니는 땅 밑에서 봄이 온다고 했다. 바야흐로 생명이 서로를 품게 하는 계절이라, 바람은 바람끼리 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품는다. 개구리는 개구리를, 사람은 사람을 품는다.

얼마 전 듀엣 낭독회에서 만난 고명재 시인이 떠오른다. 낭독을 듣다가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함께 듣던 많은 사람이 울었다. 마지막으로 산문을 낭독했을 때는 그 숱한 <슬픔의 방문>에도 울지 않던 장일호 작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사람이 사람을 품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나를 다시 울렸다. 그 자리에 모인 우리가 함께 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내 안의 깊숙한 응달 속에 남아 있던 눈덩이가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고명재 시인의 ‘뜸’이란 시에서는 “졸업식마다 안개꽃을 들고 온 사람, 가장 많은 수의 꽃송이를 주고 싶었어 가족을 불리고 아침을 차리고 붐비게 살아 그래서 지금 나를 버리는 거라고 했다”는 구절에 오래 머물렀다. 절에서 자란 적이 있다는 시인의 내력을 알아서일까. 낭독을 듣는 내내 ‘애틋한 마음’과 병치된 ‘버리는 마음’이 명치끝에 얹혔다. 낭독이 끝나자 시인은 순한 강아지같이 처진 눈매와 눈썹을 하고는 시에 얽힌 이야기를 풀었다. “어머니가 한 번도 졸업식에 온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식쯤이 되니까, 한 번은 오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기대를 안 했어요. 졸업식 날이 되었는데, 멀리서 한 여자분이 안개꽃다발을 들고 제 쪽으로 걸어오시더라고요. 어머니였어요.” 그때 시인의 어머니가 안개꽃만 가득한 꽃다발을 내밀며 한 말이 바로 “가장 많은 수의 꽃송이를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게 포란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렇게 시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껴안은 시는 사람을 울게 한다. 나는 다시 품어주고 싶을 만큼 소중한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다음주면 새 학기가 시작된다. 페이스북에선 지난 추억을 꺼내서 보여준다. 사진 속 여덟 살 아이는 새로 산 가방을 메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저 가방 속에 잘 깎은 연필과 지우개가 든 플라스틱 필통, 꼼꼼히 이름을 써넣은 공책이며 물통을 챙겨 넣었겠지. 아이 손을 잡고 처음 학교까지 걸어가던 길이 생각난다. 아이와 나는 설렘과 두려움이 묻어 있는 길을 걸어 다다른 교문 앞에서 서로의 품을 벗어날 용기를 모으느라 더 꼭 끌어안았다. 한참을 품었다 바라본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이의 눈물을 보자 나도 눈물이 났다. 꽁꽁 언 마음이 풀어지던 교문 앞의 포란이다.

감회에 젖어 아이의 방을 둘러보는데, 5년 동안 멘 가방이 낡아 있었다. 가죽 손잡이가 바스러질 것만 같다. 품었던 마음이 바스러지면 안 되는데,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 누군가에게 매일 전화를 넣는다는 것,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녁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새 떼를 궁금해하고, 큰비라도 내리면 저것들은 어디에서 비를 피할까. 새로 지은 거미집은 잘 있을까. 봄이라서 별걸 다 품어본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시드니에 와 있다. 캥거루는 이미 계절을 품고 바람을 품고 나를 품을 태세다. 나는 뜬금없이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와 더위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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