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위기 속 세계질서 재편…제조강국 한국에 오히려 기회"

입력 2023-03-19 17:29   수정 2023-03-20 01:39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입소스를 이끄는 벤 페이지 최고경영자(CEO)는 영국 정부의 ‘숨은 조력자’다. 그가 참여한 리서치는 영국 정부의 정책 입안 때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보수당, 노동당 등 집권당과 관계없이 영국 정부와 협력해오고 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페이지 CEO는 지난 13일 한국경제신문 사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세계 경제가 엄중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중 갈등, 식량 위기, 기후 변화 등 다양한 위기가 상호작용하는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복합위기)’ 시대라고 진단했다. 그는 격변의 시기지만 한국은 위기를 헤쳐나갈 저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세계 경제에 단기적으로 가장 큰 위협 요인은 무엇인가요?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코로나19 사태 때도 초반에 적절한 위기 대응을 하지 못해 수많은 사망자를 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도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알기 어려운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선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령 미국의 기준금리가 연 6%대로 인상될 경우에 대비해 시나리오를 만들어놔야 합니다.”

▷세계화 종말론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갈등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세계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입소스가 작년 9월부터 11월까지 50개국 성인 4만85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명 중 2명은 ‘세계화가 자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세계화에 긍정적인 의견을 낸 상위 20개국 가운데 10개국은 중국,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 국가였습니다. 이들 국가는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서방이 중국 배제에 나서고 있습니다.

“단기간 안에 중국을 공급망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20년은 걸리는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되겠죠. 서방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에 여러 경제적인 제재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 있던 서방 기업 중 91%가 여전히 사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방이 반도체, 배터리 등 공급망을 재배치하려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중국을 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국 기업들은 공급망 재편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서비스에 강점이 있는 국가들과 달리 제조업을 기반으로 무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제조업 강국은 오늘날처럼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동맹국과의 관계를 잘 형성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요. 한국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이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후 위기도 심각합니다.

“기후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연령, 성별, 소득 및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강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기업들도 탄소 저감에 기여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가 창출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도 있습니다. 각국의 친환경 정책이 발표되면서 클린테크 혁명에 참여할 길이 열릴 것입니다. 2차전지, 신재생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굉장히 큰 경쟁력을 나타낼 것으로 전망됩니다.”

▷한국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대해 평가해주세요.

“세계 모든 기업이 ESG 경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죠. 한국 기업들은 ESG 경영을 하는 동시에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특이한 점은 소비자 태도입니다. 한국 소비자들은 ESG 중에서 기후 위기 대응보다 사회적인 책임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직원과 하청업체들을 잘 대우하고 있는지, 법인세는 성실하게 납부하고 있는지 등을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이에 부응하기 위해 책임 경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술 발전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궁금합니다.

“한국인들은 기술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크게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의 73%가 ‘기술 발전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걱정된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인터넷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82%)는 답도 많았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혜택을 보고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동시에 누가 내 정보를 보고 있진 않을까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한 이슈에 대해 상충되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이런 현상을 ‘인지적 다형성(cognitive polyphasia)’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답변은 오히려 한국의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 전반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어떤가요?

“한국인은 경제 발전 속도에 비해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습니다. 지난달 입소스가 발표한 ‘글로벌 소비자신뢰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지난 5년간 일본에 비해 세 배나 높았지만, 한국인은 일본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경기를 비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중국인의 경우 경기를 낙관하는 비율이 한국인이나 일본인보다 두 배 높았습니다. 한국에서 균형 있는 부의 분배가 이뤄지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에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많지 않다는 조사 결과를 봤습니다.

“제 고국인 영국에선 경제 호황기였던 오래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한국은 20세기에 들어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현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 사회로 되돌아가면 좋겠다’는 한국인의 답변은 37%에 불과해 50개 조사국 중 가장 낮았습니다. 굉장히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룬 중국(39%)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덜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국 소비자의 이런 인식이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요?

“미국이나 유럽 기업은 소비자에게 ‘우리는 변함없이 좋은 제품을 만듭니다’ 같은 구호를 내세웁니다. ‘할머니가 먹던 음식입니다’라는 문구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죠. 반면 한국은 이런 향수(鄕愁)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은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저렴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식으로 강조하면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앞으로 한국 시장에서 어떤 사업을 할 계획인가요?

“한국 정부의 연구나 프로젝트에 활발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민간 기업에 비해 현대적인 경영 기법을 충분히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소스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 서비스를 개선하고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 공공기관과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벤 페이지 CEO는 보수·노동당 가리지 않는 英 정부 '숨은 조력자'
입소스는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다. 세계 9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급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기업과 공공기관의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위해 시장 동향을 파악한다는 게 입소스의 설명이다. 2019년부터 30여 개국을 대상으로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기후변화, 기술, 브랜드 구축 등 12가지 이슈에 대한 소비자 관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분석한다. 2021년 입소스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벤 페이지는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 정부에서 정책 입안의 기반이 되는 시장 조사에 참여했다. 2022년 1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그는 ‘코로나19 이후 미래를 바꿀 10가지 교훈’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생활방식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며 “이는 지도자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도전 과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페이지 CEO는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객원교수, 사회과학아카데미 멤버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TV,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정기적으로 출연해 글로벌 트렌드 조사 결과와 관련한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약력

△1965년 영국 엑서터 출생
△1986년 옥스퍼드대 경제·정치역사학 졸업
△2009년 입소스 UK CEO
△2021년~ 입소스 CEO
△현 킹스칼리지런던 정책연구소 객원교수, 영국 왕립예술학회(RSA), 런던 사회과학아카데미 펠로


허세민 기자/사진=최혁 기자 semin@hankyung.com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