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하나 메고 제주로…담아간다, 낭만

입력 2023-04-06 17:52   수정 2023-04-07 02:31

3월의 끝에서 제주를 찾았다. 단지 걷기 위해서였다. 지난 1년간 앞만 보고 달렸다. 일과 사람에 치여도 그저 달렸다. 멈추는 법을 까먹은 듯 내달리다 그만 탈이 났다. 번아웃이었다. 잠시 걷고 싶었다. 일종의 참회랄까. 걷다보면 뭔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어지러운 마음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캐리어는 없었다. 대신 배낭을 멨다. 배낭에는 가벼운 침낭과 작은 텐트를 구겨 넣었다. 물론 렌터카도 빌리지 않았다. 캐리어도 렌터카도 없이 제주에 온 적은 없었다.

오롯이 두 발로만 마주한 제주는 달랐다. 풍광부터 그랬다. 올레와 오름 사이를 하릴없이 걸을 때의 바람과 빛은 처음 접한 것이었다. 자동차 안에서는 무감각하게 지나쳤던 유채꽃들이 흐드러지게 몸을 흔들며 반겨줬다. 한갓진 제주 바다에 해녀들이 물질을 배우던 불턱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이름 없는 바닷돌 무덤인가 싶었던 것은 밀물에 밀려 들어온 고기떼를 가둬 잡기 위해 만든 ‘갯담’이라고 한다.

하루 종일 걷다보면 문득문득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여러 단어들도 두서없이 머릿속을 오간다. 이태준 작가의 <무서록>은 길동무로 챙겨 간 책이다. 질서가 없는 글이라는 제목의 책에는 쉽게 쓰인 글들에 대해 한탄하는 문장이 나온다. “인쇄의 덕으로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버릇없이 된 글, 안 된 글을 함부로 박아 돌리는 것인가 하는, 일종 참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80여 년 전 두서없이 쓰인 글이 죽비처럼 다가온다.

처량해진 마음을 위로해준 것은 작고 따사로운 제주 말씨들이었다. ‘힘들 때는 질그랭이(지그시) 머물다 가시라’든지 ‘참지 말고 숨비소리(해녀가 숨을 한참 참았다 몰아 쉬는 소리)를 내시라’ 등. 한글로 적혀 있되 제 뜻을 모르는 이에게는 그저 외국어와 같았던 말씨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걷다보면 그동안 몰랐던 몸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나는 시속 5㎞로 걸을 수 있는 인간이었으나 끊임없이 걸을 수는 없었다. 하루에 5만 보를 걷고 나면 다음날은 온전히 쉬어야 한다. 그 이상을 걸으면 고장이 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제주 도보여행에서 얻은 작은 수확이다.

함덕에서 시작한 걸음은 김녕과 월정 그리고 세화와 하도를 지났다. 더는 생각할 거리도 남지 않아 ‘숨비소리’만 헐떡이던 내 눈앞에 저 멀리 이번 여행의 목적지 비양도(飛陽島)가 보였다.

제주=방준식 기자 silv000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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