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아이 둘 부부 "하루하루 피 마른다"…악몽이 된 신혼집

입력 2023-04-11 10:10   수정 2023-04-11 11:56


2년 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한 빌라(다세대·연립) 반지하에 전세로 들어갔던 세입자가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빌라촌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던 '전세 사기'에 휘말려서다. 체납 세금이 있는 집주인은 이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없고, 정부가 내놓은 일련의 전세사기피해방지대책의 도움도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세입자 정모씨(42)는 "전세 계약 만료일이 하루하루 가까워질 때마다 피가 마른다"고 토로했다. (참고기사 : 빌라 반지하 4억 전세, 실상 알고보니…"돈 몽땅 날릴 판")
전세 만기일이 보증금 날리는 날 될텐데…"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11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세입자 정씨는 내달 31일 전세사기 피해자가 된다. 아직은 계약 만료일이 도래하지 않아 피해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계약이 만료되면 당장 은행으로부터 빌린 1억9000만원의 전세보증금을 갚아야 한다.

'집주인에게 받아서 갚으면 될 것을 무슨 호들갑이냐'고 할 수 있지만 이 집의 집주인은 현재 체납 세금이 있다. 세입자 정씨에게 전세보증금을 내줄 처지가 되질 않는 집주인 A씨는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을 1년 10개월째 되풀이하고 있다. 이전 집주인과 어떤 관계인지, 현재 세금 납부가 가능한지 여부를 정확하게 파악하긴 어렵지만 체납을 해결하겠다는 의사만 밝힐 뿐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고 있다.

정씨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와 10월에 태어날 둘째가 있는데 막막할 따름"이라면서 "신혼 첫 집에서 전 재산을 잃고 빚까지 지게 생겼다"고 호소했다.


2021년 6월. 정씨의 악몽은 시작됐다. 신혼 전셋집을 구하던 정씨는 지금 사는 이 집이 마음에 들어 당시 집주인 B씨와 계약을 맺고 6월 잔금을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잔금을 치르는 날 기존 집주인 B씨는 '새로운 집주인'이라면서 현 집주인 A씨를 데리고 왔다.

B씨는 A씨에게 집을 팔았다고 했다. A씨가 아직 매각대금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전세보증금을 자신에게 주면 된다고 했다. 이 자리에는 분양실장이라는 C씨와 부동산 공인중개인 D씨도 동석했다. 이들 역시 이런 거래가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5명이 모인 가운데 이뤄지는데다 위임장도 없이 당사자도 모두 참석했기에 정씨는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씨는 불안한 마음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전세보증보험을 신청했다. 한 달 뒤인 7월 HUG에서는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새 집주인 A씨가 국세를 내지 않아 인천세무서에서 이 집을 압류했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정씨는 기존 집주인 B씨와 분양실장 C씨, 부동산 공인중개사 D씨 등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들은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얘기했지만 결국엔 이들과 연락이 모두 끊겼다. 당시 시장에 만연했던 전형적인 '전세사기' 수법에 걸린 것이다.
정부, 전세 사기 피해 방지 방안 내놨지만…무용지물
정부는 지난해 9월 '전세 사기 피해방지방안'을 내놨다. 주택담보대출 실행 때 임대차 확정일자 부여 현황을 확인하도록 하고 주택담보대출 신청이 들어오면 전세보증금을 감안하도록 시중은행들과 협의하기로 했다.

임대인에게 전세 계약 전 임차인이 요구할 경우 세금 체납 사실이나 선순위 보증금 규모 등 정보를 제공할 의무도 생겼다. 담보 설정 순위와 관계없이 임차인 보증금 중 일정 금액을 우선 변제하는 최우선 변제금액도 상향 조정됐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도 강화했다.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에게는 주택도시기금에서 1억6000만원까지 연 1%대 저리로 긴급자금 대출을 지원한다. 자금이나 거주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에게는 HUG가 관리하는 임대주택 등을 최장 6개월까지 시세의 30% 이하로 거주할 수 있도록 임시거처도 마련해준다.

후속 조치로 세입자가 집주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집주인 체납세액 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관계 법령을 고쳤고, 세입자가 억울하게 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매에 이미 넘어간 집의 매각대금도 세금보다 임차보증금으로 일부분 먼저 지급되도록 제도를 손봤다.


하지만 정씨의 경우 이런 제도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 피해가 불보듯이 뻔한 상황이지만, 정작 '피해는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집주인 체납 사실 열람의 경우 집을 계약한 이후에서 입주 전까지만 가능해 사실상 입주한 이후 피해를 본 세입자들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체납 금액을 알 수 없으니 소송 등을 통해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얼마나 회수가 가능한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전세피해지원센터 관계자는 "피해가 확정되지 않은 세입자도 대응방안에 대해 상담을 받을 수 있다"며 "다만 금액 지원 등에 있어서는 피해 사실 확정 여부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전세 계약 만료일 도래하면 어쩌나…"장기 분쟁 대비해야"
정씨의 전세 계약 만료일은 내달 31일까지다. 정씨가 받은 전세자금대출은 모 시중은행 상품으로 약관에 '담보재산에 대해 압류명령이나 체납처분 압류통지가 발송된 때에는 대출금을 즉시 상환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다. 계약이 만료되면 은행으로부터 빌린 1억9000만원을 갚아야 한다.

만약 정씨가 은행에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면 은행은 보증기관(해당 상품의 경우 SGI서울보증보험)에 보증금을 청구한다. 이후 보증기관은 1억9000만원을 은행에 대신 주고(대위변제) 세입자에게 해당 금액을 받아낸다. SGI서울보증보험 관계자는 "보증기관은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의 계약과는 상관이 전혀 없다. 임차인 대신 은행에 갚아준 돈만 돌려받으면 된다"고 했다.


세입자 정씨는 보증기관에 돌려줄 자금 마련을 위해 집주인에 전세금반환소송을 걸어야 한다. 소장 접수, 변론기일 확정, 선고 진행 등 일련의 재판 과정은 적게는 6개월, 많게는 1년 이상도 소요된다. 그렇다고 해서 보증금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등기부등본에 있는 압류, 근저당권 등 선순위에 따라 배당이 이뤄진다. 소송에서 자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면 별로도 '추심'이라는 제도를 통해 집주인의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이 있다. 이는 시간과 비용이 더 소요된다.

엄정숙 법도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는 "행정절차를 밟으면 시간, 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며 "장기전을 대비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대부분 보증금 회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호소한다. 이들은 공통으로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대책이 상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아무래도 전세사기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이후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도 개선 등 시급한 사항을 위주로 방안이 마련된 것이 사실"이라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구제기금'을 조성하는 것을 한 가지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상당 부분 이익을 낸 시중은행들이 나서 '피해자 구제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장기간 저리 혹은 무이자로 피해자에게 대출을 해주는 방식"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정부도 피해자 구제방안과 관련해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구제 대상, 피해 금액 범위 등을 두고 뚜렷한 기준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지금까지 나온 예방책과 함께 예비 세입자가 집을 조금 더 꼼꼼하게 구하는 게 현재까지 전세 사기에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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