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리뷰] 피아니스트 백혜선, 노장은 익숙함 대신 새로움을 들고 나왔다

입력 2023-04-12 18:47   수정 2023-04-27 18:03


플로렌스 프라이스(1887~1953)란 미국 작곡가가 있다. 식당마다 백인 전용 화장실이 있는 인종차별 시대를 살았던 흑인 여성 음악가다. 세련되고 오묘한 화성을 만드는 솜씨가 드뷔시 못지않았지만, 주류 음악계는 흑인 여성이란 이유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 피아노 유망주들이 겨루는 국제 콩쿠르도 30~40년 전엔 그랬다. 주요 콩쿠르의 가장 높은 자리는 언제나 백인 남성 몫이었다. ‘서양 음악의 꽃’인 피아노의 주인공을 동양 여성에게 내준 적은 거의 없었다.

백혜선(58)은 깨질 것 같지 않은 ‘유리 천장’을 부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1989년 윌리엄카펠 국제 콩쿠르 1위를 차지한 그는 김선욱, 손열음, 조성진, 임윤찬 등이 나오기 전에 세계 무대를 휩쓴 ‘국가대표’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그가 약 2년 만에 한국 무대에 섰다. 지난 1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오랜만에 관객 앞에 선 그를 맞으려는 팬들로 가득 찼다.
흑인 여성 작품 선보여
무대에 오른 백혜선의 얼굴엔 미소만 보였다. 그 표정에 40여 년 음악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연륜이 느껴지는 자태와 달리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손놀림은 20대 못지않았다.

첫 번째 곡은 국내에서 처음 연주하는 프라이스의 ‘스냅사진’. 거울호수, 구름에 걸친 달, 타오르는 불꽃 등 세 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드뷔시를 연상하게 하는 화성이 일품인 곡이다. 마이크를 잡은 백혜선은 “프라이스는 (실력은 있지만 흑인 여성이어서)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라며 “더 많은 작곡가를 한국 팬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곡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백혜선의 얼굴에서 온갖 편견과 역경에도 예술에 대한 꿈을 꺾지 않은 프라이스의 인생이 오버랩됐다.

알 듯 말 듯한 곡이 이어졌다. 서주리 미국 프린스턴대 작곡과 교수(42)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번 ‘봄’이다. 백혜선이 서주리에게 직접 작곡을 의뢰한 곡. 지난겨울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이다. 홍난파의 가곡 ‘고향의 봄’ 선율을 활용한 네 개의 변주곡으로, 전 국민이 익숙한 ‘나의 살던 고향은’의 선율을 쪼개고 더했다.
연주력에 스토리까지 갖춘 ‘현역’
이날 레퍼토리가 평소 접하기 힘든 곡으로만 구성된 건 아니었다. 클래식 애호가에게 친숙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5번 F장조도 연주했다. 1악장에선 근육이 경직된 탓인지 빠른 구절에서 뭉개지거나 양손이 협응하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백혜선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색과 노래하는 듯한 멜로디 표현은 여전했다.

2·3악장에선 그야말로 피아노를 갖고 놀았다. 론도(주제부와 삽입부를 반복하는 고전음악 형식) 3악장은 같은 주제 선율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이때마다 다른 음색을 들려주며 다채롭고 정교한 모차르트를 구현했다. 모차르트 소나타는 ‘어린이도 연주하는 쉬운 곡’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연주하기는 까다로운 작품이다. 악보가 간결한 만큼 반듯하게 건반을 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것만으론 모차르트의 맛을 살릴 수 없어서다.

2부 주인공인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친구 하르트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작곡의 계기가 된 작품으로, 하르트만의 그림 10장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다. 러시아 음악 특유의 광활함과 민속적인 요소가 가득해 많은 연주자에게 사랑받는 명작이다. 30분짜리 대작이어서 후반부에 힘이 달리는 구간이 있었지만, 녹슬지 않은 테크닉과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메웠다.

백혜선은 지난 1월 발간한 첫 번째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에서 지금이 ‘인생의 3기’라고 했다. 콩쿠르 스타였던 20대가 1기라면, 워킹맘이던 중년 시절이 2기, ‘노장 연주자’가 되고 있는 지금이 3기라는 얘기다. 그는 여전한 현역이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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