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반일도 친일도 아닌 용일(用日)의 시간

입력 2023-05-10 18:11   수정 2023-05-11 00:21

“마음이 아프다(心が痛む思いだ)”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사과는 현시점에서 최대치였다고 본다. 이 표현을 일본어 용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죄악감이나 미안함 등으로 참을 수 없이 괴롭다’고 나온다. 일본어 전문가들은 ‘정치 여건상 정부 차원의 사죄를 하진 못하지만, 징용공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뉘앙스라고 한다. 이런 방식의 사과가 국민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진정한 사과’를 요구해온 사람들은 노골적 반감을 표시한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 있다. 사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성의를 다한 것인데도 모자란다고 하면 더 굴욕적인 표현을 요구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굴욕적 언사에는 ‘이만하면 됐다’는 기준과 경계가 없다. 어떤 표현을 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끝없이 꼬투리를 잡는다. 한국과 일본을 떼어놓는 것으로 이념적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종북좌파와 얼빠진 정치인들, 반일몰이를 이권화한 일부 단체가 대체로 그렇다.

한·일 관계 정상화 문제는 근원적이면서도 난해하다. 우리 국민은 대체로 일본을 대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겁내지도 않는다. 일본의 경제력이 여전히 압도적이고, 6개월 내 핵무장이 가능하며, 자위대 전력이 미국 중국 러시아 다음으로 막강해도 그렇다. 실력이나 우월감의 발로가 아니다. 일본은 영원히 죄인이고, 우리는 언제든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채권자라는 의식 때문이다. 이런 일방성이 일본의 독도 언급과 역사 왜곡 문제로 복잡하게 뒤틀렸다. 그래서 옆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관계가 돼버렸다.

한·일 관계는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 사이에 존재하는 양자적 관계다. 미국을 매개로 각자 안보를 보장받고 있기에 서로 위협적이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도 공유하고 있다. 만약 역사적 앙금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정상적 선린외교가 이어졌다면 한·미·일 3국은 진작에 다자 간 안보동맹으로 나아갔을 터다. 한·일 관계 교착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북한과 중국이다. 일본은 한반도 유사시에 미군의 군사·병참기지 역할을 하도록 돼 있다. 6·25 전쟁 때도 그랬다. 한·일 갈등은 이런 방식의 안보 체제 작동을 어렵게 만든다. 만약 미군이 일본 대신 태평양 너머 본토로부터 전쟁물자를 조달받았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건국 정당성에 흠집을 내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종북 좌파들은 한사코 한·일 관계 개선에 훼방을 놓는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반일몰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공산세력이 점령한 동북아시아 끝자락의 외로운 나라다. 경제 외부 의존도가 60%에 달하지만 미국 말고는 확실한 우방이 없다. 더구나 미국은 멀리 떨어져 있다. 한·일 관계는 미국을 통해 작동한다. 정치인들은 방관적이고 수세적이다. 외교의 바다가 잠잠하고 안보의 파고가 높지 않았을 땐 큰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일본이라는 인접 강국을 방치하는 것은 외교적 비효율일 뿐만 아니라 안보상의 큰 기회 손실이다. 감정이 아니라 현실적 계산의 문제다. 일본의 전략적 활용도는 생각 밖으로 높다. 한·미 관계, 한·중 관계, 한·러 관계, 남북 관계에 일본을 끼워 넣으면 한·미·일, 한·중·일, 한·러·일, 남·북·일 관계가 된다. 지역적으로 세계적으로 보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외교술을 구사할 수 있다. 미국, 일본과 더 밀착하면 중국의 반발이 더 거세질 것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친구 없는 외톨이 국가는 굴종과 예속의 길을 걸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의 야멸찬 선동과 지지율 하락, 외교안보 참모를 교체하는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셔틀외교 복원을 서둘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격변의 시기에 국가 지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야당 지도자가 여기에 대해 학교폭력의 극악스런 상징과도 같은 ‘빵 셔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부적절했다. 한·일 피차간에 정치는 빠져야 한다. 양쪽 국민이 서로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대하면 못 할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이미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관계 정상화를 떠들지 않아도 서로 잘 놀러 다니고 상대방 음악과 영화를 즐긴다. 일본에선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잇달아 성공을 거두고 있고, 한국에선 ‘스즈메의 문단속’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다. 반일단체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청년들은 그것과 별개로 일본에 닥친 대재앙의 비극과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 자유와 인권 생명을 중시하는 보편국가의 건강한 젊은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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