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해도 봐주자…너무 아까워" 천재 중의 천재는 어떻게 됐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5-13 08:18   수정 2023-05-13 17:00



“아무래도 그를 사면해줘야 할 것 같아.”
그자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른 전과도 셀 수 없이 많고요. 피해자 가족들은 저만 보면 엎드려 울며 ‘그를 꼭 잡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사면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그래도 말일세. 그 남자는… 그림을 너무 잘 그린단 말이야. 이걸 보게. 그는 인류의 보물이라고.”

1610년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에서 오간 이 대화. 지금 들으면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축구선수가 공을 잘 찬다고,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살인을 용서해주자는 것과 똑같은 얘기니까요. 사실 500여년 전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식의 사면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회화 거장 카라바조(1571~1610)의 ‘악마적인 재능’은 이런 상식을 무시할 만큼 탁월했습니다. 주 고객이었던 로마 권력층과 귀족들은 물론 시민들도 그의 복귀를 은근히 기대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됐을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회화의 혁명가’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가난했던 소년, ‘최고 화가’ 반열 오르다


카라바조는 화가의 출신지(밀라노의 카라바조)에서 따온 애칭이자 별명이고, 그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입니다.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붙여준 부모님도 아들이 훗날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미술 거장이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유복한 편이었던 카라바조의 집은 6살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별다른 수입 없이 다섯 명의 아이들을 길러야 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어린 카라바조의 학교이자 놀이터는 거리였을 겁니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게 카라바조의 취미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작품세계와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카라바조의 어린 시절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자노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수업을 다 받은 카라바조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부와 명예를 좇아 로마로 향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을 좀 했습니다. 하숙을 했는데 집주인이 워낙 구두쇠여서 매일 저녁을 샐러드로만 때우기도 했고요. 일종의 미술품 복제 공장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찮은 일을 하는데도 카라바조의 빛나는 재능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카라바조라는 젊은 화가가 있는데, 실력이 대단하다더라”는 소문이 ‘미술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한 겁니다. 카라바조가 인생 최대의 후원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입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실력에 홀딱 빠진 추기경은 카라바조를 후원하고 보증해 그의 앞길을 열어줬습니다.


스물여덟살이 되던 1599년, 카라바조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옵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예배당을 장식할 그림을 수주한 겁니다. 교회가 처음부터 카라바조에게 작업을 맡기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원래 작업을 맡기려고 했던 화가가 너무 바빠서 ‘대타’를 구하다 보니 카라바조에게 기회가 왔던 거지요. 하지만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교회는 그림을 보려는 이탈리아 각지의 가톨릭 신자들로 연일 북적였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이에 맞서 ‘그림’으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어설픈 백 마디 설교보다도 신의 위엄을 보여주는 그림 한 장이 더 효과적이라고 봤던 거지요. 그런데 카라바조가 ‘신과 같은 솜씨’로 그린 작품은 신앙심이 흔들리던 사람들조차 붙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테네브리즘(빛과 어둠을 강렬하게 대조시켜 극적인 효과를 더하는 그림 기법)은 성경 속 극적인 순간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극대화했습니다. 카라바조는 곧장 로마의 ‘슈퍼스타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예술, 그리고 광기


그는 우리가 ‘천재 예술가’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그대로 현실에 가져온 듯한 존재였습니다. 그리는 방식부터가 천재적이었습니다. 그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눈앞의 모델을 보고 캔버스에 바로 그림을 그렸지요. 당시 화가들은 ‘초보자들이나 쓰는 허접한 방식’이라고 뒤에서 욕했지만, 완성된 작품을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카라바조 작품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은,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는 르네상스 화풍에서 벗어나 대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점입니다. 그는 항상 서민이나 매춘부 등 거리에서 온 이들을 모델로 세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탓에 카라바조의 그림에 나오는 성인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고통, 분노와 증오, 욕망과 비겁함 등 정제되지 않은 거친 성품이 드러나 있습니다. 종교적인 그림도 속세의 그림처럼 그린 거지요.



이런 점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와 천사’의 첫 번째 버전에 대해 교회 관계자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불경하니 다시 그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성스러운 모습을 부각해야 하는 성인을, 발톱에 때가 낀 더럽고 무식한 농부로 묘사했거든요. ‘성모의 죽음’ 역시 불경하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당했고요. 하지만 꽉 막힌 교회 사람들과 달리 대중과 젊은 화가들은 그의 작품을 ‘기적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화가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카라바조의 그림은 ‘추한 것도 아름답고 숭고한 것들처럼 신이 창조한 작품’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겁니다.


‘천재 예술가’라는 점을 감안해도 카라바조의 성격은 극도로 난폭하고 괴팍했습니다. 싸움을 즐겨 툭하면 사람을 때리거나 패싸움에 뛰어들었고, 칼을 뽑아 들었다가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된 적도 많았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델 몬테 추기경을 비롯한 후원자들의 로비로 별문제 없이 풀려났습니다.

웬만한 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으니 카라바조는 갈수록 안하무인이 돼갔습니다. 1603년 8월 명예훼손으로 피소, 1604년 4월 식당 종업원의 얼굴에 접시를 집어 던져 피소, 10월 경찰 모독죄로 구속, 11월 공무집행방해로 구속, 1605년 불법무기소지죄 및 경찰 폭행으로 구속, 7월 20일 모욕죄로 구속, 7월 28일 상해죄로 수배, 9월 1일 창문에 돌을 던져 깨트려 기물파손죄로 피소. 급기야 그는 그는 1606년 동네의 ‘금수저 건달’과 싸우다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카라바조를 강력히 처벌하라고 압박했고, 죄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후원자들도 더는 카라바조를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저주가 된 ‘악마적 재능’


카라바조는 야반도주를 택했습니다. 그림 도구만 챙겨 조수와 함께 로마에서 도망친 거지요. 그에겐 ‘일급 추방 명령’이 내려졌는데, 누군가가 카라바조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뜻했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던 카라바조는 로마의 세력이 닿지 않는 남쪽의 나폴리에 정착했습니다. 맨몸 하나만 왔지만 그림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그는 불과 몇 달 새 나폴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됐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항상 ‘누군가가 나를 잡으러 올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처벌은 피했지만 죄책감과 도피 생활의 스트레스에서는 달아날 수 없었던 거지요. 그는 몰타와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돌아다니며 여러 작품을 그렸습니다. 작품값은 사면을 위한 로비 자금으로 썼고요. 몰타에서는 기사단에 잠깐 공식 화가 자격으로 가입까지 했습니다. 기사단 가입에는 교황청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실상 교황청이 ‘사면해주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셈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카라바조는 또 사고를 쳐서 일을 망쳤습니다. 동료 기사를 모욕했다가 기사단에서 추방된 거지요.


카라바조의 성격은 갈수록 이상해졌습니다. 당시의 여러 기록에는 다른 화가들을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비판 한 마디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당장 찢고, 잘 때도 완전 무장을 하고 자는 등 카라바조가 벌인 여러 기행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죄와 기행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은 기어코 카라바조를 사면해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림을 너무 잘 그린다는 이유로요.

살인죄도 용서받을 만큼 대단한 화가였지만 그 최후는 허무했습니다.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병에 걸려 39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겁니다. 그의 명성도 허무하게 쪼그라들었습니다. 사후 불과 수십 년 만에 카라바조의 작품은 미친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무시당하거나, 창고에 처박혀 존재조차 잊혔습니다. 워낙 ‘비호감 캐릭터’여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화가나 미술사가들이 카라바조에 대해 악평을 많이 남긴 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자를 키우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기에 반박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 평가와 별개로, 그의 사실적인 기법과 빛과 명암을 이용한 극적인 구성은 서양미술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르네상스를 끝내고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열어젖힌 개척자’로 평가합니다. 이탈리아의 탁월한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가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카라바조가 없었다면 베르메르와 렘브란트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들라크루아와 마네의 그림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재능은 카라바조의 삶에 저주로 돌아왔습니다. 일탈을 저질러도 용서받으니 ‘브레이크’가 고장난 성격은 갈수록 난폭해졌고, 결국 이런 성질은 폭주해 타인과 자신을 해치고야 말았지요. 그가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평범한 화가였다면 어땠을까요. 미술사 책에 이름이 적히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그의 개인적인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겁니다.

대단한 재능이 없어도, 성실하게 살면서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면 인생의 여러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예컨대 5월의 봄날 주말 같은 건 천재가 아니라도 누구나 만끽할 수 있는 행복이지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참고자료) 이 기사의 내용은 <카라바조>(프란체스카 마리니 외 지음, 최경화 옮김, 예경), <카라바조 : 극적이며 매혹적인 바로크의 선구자>(로돌포 파파 지음, 김효정 옮김, 마로니에북스), <빛과 명암이 만든 바로크의 사실주의 : 카라바조>(윤익영 지음, 재원)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김상근 지음, 21세기북스)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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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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