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반지성 정치의 미래

입력 2023-05-29 18:02   수정 2023-05-30 00:18

‘전설의 마케팅 구루’ 세스 고딘만큼 ‘확증편향’을 꿰뚫어 본 이가 있을까. 그는 저서 <보랏빛 소가 온다>에서 “불특정 대중을 버리고 충성도 높은 소수를 잡으라”고 했다. 나아가 “그들이 꿈꾸는 것, 믿는 것,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라”고 권했다. 그래야 브랜드 첫인상을 고착하고, “OOO은 언제나 옳다”고 믿는 일종의 인식 세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은 보편적이다. 이 인간 심리를 마케팅에 잘 이용하는 곳이 정치판이다. 공동의 적을 만들고 증오와 적개심 같은 광기를 분출케 하는 선동은 무리를 손쉽게 규합해 적을 타격할 효과적 수단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 빚을 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근대 정치가 수명을 유지한 것은 야만의 역류를 문명으로 치환하는 지성의 필터링이 꾸준히 작동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놓고 벌어지는 선동은 우리 사회가 힘들게 축적한 신뢰 자산을 해치는 반지성적 퇴행이다. 과학과 외교로 풀어야 할 문제를 민족 감정과 확증편향을 자극해 풀려는 무지가 판을 친다. 시찰단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평가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반국가적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단부터 내놓는 무책임 정치가 춤을 춘다. 그러자 추종자들은 “오염수가 안전하다고 호도하는 모든 토착 왜구를 축출해야 한다”고 거품을 문다. 광우병 촛불 시위 때 목격한 그 확증편향 마케팅이 또 등장한 것이다.

토착 왜구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이 싫어도 한·일 관계는 미래지향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는 건 맞다. 후쿠시마가 불안하긴 하지만 미신적 저주 대신 합리적 의심과 과학적 데이터가 우선이며, 이를 설명하는 이들의 학자적 양심을 믿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얘기다.

후쿠시마 바닷물이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태평양을 돌아 제주도 앞바다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년이 넘는다. 이 과정에서 암 등 여러 질병을 일으킨다는 삼중수소의 경우 1조분의 1 수준으로 희석된다. 이는 비와 공기 등 한반도 자연에 존재하는 삼중수소 양보다 적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그렇다면 다핵종제거설비(ALPS)가 걸러내지 못할 수도 있는 스트론튬, 플루토늄 등 다른 핵종이 한국 해역으로 들어와 해산물에 스며들고, 먹이사슬에 축적돼 후대에 유전될 확률은? 대다수 과학자는 “농도가 워낙 미미해 무시해도 될 수준”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후쿠시마에서 가장 먼 곳”이라는 지적(강건욱 서울대 핵의학과 교수)이 설득력을 얻는 배경이다. 이들이 토착 왜구들인가.

그런데도 ‘안전의 안’자만 꺼내면 “그 물 네가 먼저 마시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전문가들이 “일본은 일본, 과학은 과학”이라고 해도 들은 체 만 체다. 국제기구의 판정을 기다리자고 하면 “심판도 의심스럽다”며 모든 것을 부정한다. 탈원전의 속내를 감춘 반이성의 극치다.

인류가 수많은 희생에도 원자력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문명의 이기가 일으키는 부작용보다 효용의 크기가 훨씬 크다는 공감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전 세계 원전사고 사망자보다 많은 한 해 1만3000명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 1990년대 초 한국이다. 그사이 자동차를 없애자는 주장은 없었다.

다시 세스 고딘. 그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면 필패”라고 했다. 민족 감정을 원료 삼는 선동 정치는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킬지 모른다. 그러나 찰나의 구호로는 해를 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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