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곳곳 포탄 쏟아지는 와중에도…그녀는 건반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입력 2023-07-06 18:17   수정 2023-07-07 02:55


‘벨르 에포크’라는 말이 있다. 불어로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이 말은 앞에 불어 정관사 La를 붙여 쓰면 유럽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변신한다. 이때 ‘벨르 에포크’는 대략 19세기 후반에서 1914년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절은 인류의 과학과 문화, 예술이 풍성하게 꽃피던 시기였다. 학자마다 벨르 에포크를 규정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모두가 동의하는 건 이 벨르 에포크 시대가 종식된 해다. 모호한 시작과는 달리 ‘아름다웠던 시절’의 끝은 명확히 1914년이다. 시작이 어물쩍하던 시대 구분이, 어째서 그 끝은 칼로 무 자르듯이 1914년이라는 말인가?

그건 바로 1914년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였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화가 급성장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로 규정한 시대였지만, 사실 이 벨르 에포크가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바로 인류 역사에서 끝없이 지속되던 전쟁이 없던 유일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니스트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였던 ‘반다 란도프스카’ 또한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1879년 변호사인 아버지와 언어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신동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불행한 유대인 피아니스트였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녀는 21세의 나이에 파리 스콜라 칸토룸 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그녀의 공로는 피아노에 밀려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악기, 하프시코드(쳄발로)를 살려냈다는 점이다. 1903년 그녀는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당시 사라진 악기인 하프시코드로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음악학자로도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그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912년에는 그녀의 설계에 의한 새로운 쳄발로를 ‘플레옐사’에서 선보였고, 이듬해 베를린 국립예술대는 쳄발로 클래스를 개강해 란도프스카를 초대 교수로 초빙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후 프랑스로 이주해 프랑스 시민권을 얻고, 파리 외곽에 학교이자 콘서트홀을 설립해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1940년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는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녀는 이 사태가 그리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달랑 여행 가방만 챙겨 집을 떠났다고 한다. 게슈타포의 체포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던 그녀는 다행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남겨두고 온 수많은 악기와 수천권의 책, 그리고 그녀의 모든 재산이 나치에 의해 약탈당했다. 그녀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무일푼 상태였다고 한다.

피아노의 보급으로 하프시코드가 사라질 운명에 처하자, 란도프스카는 온 정열을 기울여 하프시코드를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녀를 ‘현대 하프시코드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살려낸 건 하프시코드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우리가 ‘피아노의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세계 최초로 리코딩하기도 했다. 이후 이 곡은 여러 연주자에게 영감을 주면서 오늘날 바흐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게 만든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 줬다. 또한 바흐의 작품들과 함께 바흐와 동갑내기 작곡가였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500개가 넘는 소나타도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빛을 보게 됐다. 스카를라티의 작품 번호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랄프 커크트릭 또한 그녀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1940년 파리를 떠나기 직전에 녹음한 ‘스카를라티 소나타 앨범’에는 믿을 수 없는 소음이 음악과 함께 녹음돼 있는데, 그건 놀랍게도 실제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녀가 파리의 한 녹음실에서 스카를라티의 D장조 소나타, 커크패트릭 번호 490번을 연주하는 동안 그녀의 스튜디오 근처에 독일군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그 폭발음이 음악과 함께 고스란히 녹음된 것이다.

이상민 클래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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