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물이 만드는 생리활성물질은 미생물이 살아가기 힘든 열악한 환경이나 외부 침입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는 이런 물질들을 활용해 항암제와 항생제 같은 많은 의약품을 개발했다. 푸른곰팡이 ‘페니실리움’에서 발견된 항생제 페니실린이 대표적이다. 결핵 치료에 쓰이는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 또한 미생물에서 비롯됐다. 미생물 천연물을 활용한 신약 개발 연구는 1990년대 이후 다국적 제약사들이 조합합성화합물 위주 신약 개발에 나서면서 침체기를 맞았다. 하지만 최근 몸속 장내미생물이 인간 면역체계와 신경 발달 등에 다양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미생물 연구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화학생물연구센터도 오랜 기간 다양하고 특수한 환경에 사는 미생물에서 신규 물질을 발굴했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물질이 반드시 새롭고 특수한 환경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꼭 신종 미생물에서만 새로운 물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신종 미생물을 확보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배양이 힘든 경우가 많아 새로운 물질 탐색까지 이어지기 어려웠다. 이에 연구진은 주변의 가까운 환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휴일, 휴가 때 인근 토양시료(샘플)를 채취하여 미생물을 찾는 ‘생활 속 샘플링’이다. 전국 다양한 환경에서 미생물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2013년 울릉도를 방문한 대학원생이 가져온 울릉도 토양에선 200여 개 방선균(흙에 사는 미생물)을 분리해 신규 물질을 발굴했다. 항균 능력이 있는 ‘울릉가마이드’, 항암 효능을 지닌 ‘울릉마이신’ ‘울릉고사이드’ ‘울릉아닐린’을 비롯해 암 전이를 막는 ‘울릉도린’ 등 울릉도 지명을 넣은 화합물을 국제 학술지에 보고했다. ‘보성가제핀’ ‘해남인돌’ ‘금산놀’ ‘제주케토마이신’ ‘제주카바졸’ 등과 같이 이제껏 보고되지 않은 화학골격과 생리활성을 갖춘 신규 화합물들에 국내 지역명을 붙여 토종 미생물과 화합물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연구진은 세계 최고 경쟁력을 보유한 연구기관인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연구그룹과 지난 20여 년간 국제공동연구 및 인력교류 등을 이어왔다. 양 기관이 공동으로 구축한 ‘생명연-리켄 화학생물공동연구센터’가 주축이다. 양 기관은 미생물에서 유래한 생리활성물질을 탐색해 암 비만 당뇨 골다공증 등 다양한 질환에 적용할 수 있는 신약후보물질 개발을 위한 연구 성과를 내왔다.
신약 개발의 출발이자 근간이 되는 미생물 유래 천연물 연구 분야에서 한국의 수준은 미국 일본 중국 등과 더불어 선도적인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 역량을 초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연구자 각자가 최고의 연구 역량을 갖출 뿐만 아니라 국제 협력을 강화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정리=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