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꽃이 좋아지는 나이

입력 2023-07-14 17:29   수정 2023-07-15 00:13

능소화가 장맛비에 다 떨어져 있다. 장마가 올라오기 전부터 능소화 줄기가 얼마나 부지런히 꽃을 밀어내는지 옆에서 보기만 하는데도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팔을 불듯이 꽃잎이 길어졌다가 약속한 소리를 내듯 하나둘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보았다. 매일 오가는 길목에서 꽃을 보는 일이 이렇게나 좋을 수 있다니.

얼마 전 낭독회 자리에서 김현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꽃이 예쁘다는 걸 알게 된 거라고 했다. ‘어머나, 꽃을 좋아한다는 게 나이가 든 증거라니. 나는 꽃 안 좋아해야겠다.’ 속말을 했다. 꽃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말도 있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싶다가도 꽃 사진을 찍어 보내는 친구들이 마흔 줄에 와서 느는 것만 봐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왜 꽃이 좋아졌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런데, 왜 나이가 들면 꽃이 예뻐 보이는 걸까요?”

그러자 관객석에서 손을 번쩍 든다. ‘구나’라는 자신의 닉네임을 소개한 분이 말했다. “젊을 땐 꽃이 자기 안에 있으니까요.” 우아, 어쩜 말도 꽃같이 하실까. 그러자 앞에 앉은 이동우 시인이 거들고 나섰다. “젊은 시절에는 자기 안의 변화가 너무 스펙터클해서 밖을 볼 새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 그 변화들이 잦아들고 바깥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10대 20대 시절, 내 안의 스펙터클함을 떠올려 본다. 정말 환장할 정도로 스펙터클했지…. 날이면 날마다 키가 자라고 생머리인 줄 알고 컸는데 어느 날 친구가 나더러 곱슬머리라고 하고 입에 대지도 않던 고추와 생마늘을 스스로 집어 먹게 되는 놀라운 여정이었다. 롤러장도 가고 바닷가도 가고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외박도 했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짓만 하고 살았는데, 그런대로 자라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꽃이 좋아져 버렸다. 늙은 것이다. 이런 청천벽력이라니.

내 몸에서 나온 나밖에 몰랐던 아이도 이제 나와 멀어지려고 한다. 사춘기인가보다. 바르게 크길 바라지만 청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아이는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바르다’라는 말은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거나 반듯하다”라는 뜻인데 어째서인지 이 장맛비엔 바른 것만 휩쓸려 간다. 굽은 것만이 멀쩡하다. 뾰족지붕은 멀쩡한데, 반듯한 지붕에서 비가 샌다. 물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반듯함에 대해서 오래오래 생각한다.

김은지 시인에게 낭독회 때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나이 들면 꽃이 좋아진다는 말처럼 쓰는 말이 있다며 “나이가 들면 참외 맛을 안다”는 말을 알려주었다. 나는 여전히 참외보다 수박이 맛있긴 하지만, 어릴 때처럼 참외 맛을 모르진 않는다. 미각이 발달하여 밍밍하고 슴슴하던 참외가 확 달아지는 순간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맛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고 할까? 점점 나이 든다는 게 좋아진다. “내가 텔레비전 퀴즈쇼에선가 들었는데 인간의 뇌는 중장년이 가장 뛰어나대.” 김은지 시인은 꽃이 좋아지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더 좋아진다. 찾아보니 정말이다.

여성 심리학자 셰리 윌리스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나이 들수록 인지능력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중년이고 감각이 깨어 있으며 인식의 폭이 넓어 이해력이 높다. 이해하니까 누릴 수 있다. 더 마음껏 좋아할 수 있다. 꽃이 이렇게 예쁘다면, 다른 많은 사물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일까? 나이 드는 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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