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복거일 "이승만 걸어온 길 들여다보라, 우리 시대 어려움 하찮아 보일 것"

입력 2023-07-30 18:05   수정 2023-07-31 00:09


복거일 선생(77)의 작업 또는 직업을 한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작가 자신은 ‘소설가’를 사랑한다. 실제로 대체역사소설 과학소설 지식소설을 개척하는 탁월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60권이 넘는 저작을 아우르는 통섭적 지식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은 작가의 전형을 넘어선다. 사실에 바탕한 역사인식, 문명사적 안목, 깊은 과학적 지식은 이념적 진영논리로 빠져들기 십상인 국내 지성계에서 독보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복 선생이 본령인 연작 소설로 문단과 사회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일대기를 다룬 다섯 권짜리 대하전기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내놨다. 복 선생 손에서 탄생한 이승만 이야기는 시대 흐름을 보여주는 스케일과 깊이가 남다르다. 쉬 접하기 어렵던 선조들의 독립투쟁사가 눈앞의 일처럼 펼쳐진다. 일제의 진주만 공습, 샌프란시스코조약, 볼셰비키혁명 등 수많은 세계사 명장면을 탁월한 솜씨로 버무렸다. 이승만 일대기를 넘어 오늘의 질서를 만들어낸 20세기 격동의 세계사를 써내린 대작이다. 그의 말처럼 요즘 세상에 대하소설은 시대착오적이다. 소득 증가로 즐길 일이 넘쳐나면서 시간의 기회비용이 급증하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그는 2800장의 묵직한 원고를 세상에 내놨다. “우리를 알자면 역사를 배워야 하고, 이승만에 관한 지식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핵심입니다.”

책 제목 <물로 씌어진 이름>은 ‘나쁜 행태는 청동에 새겨져 남고 덕행은 물로 쓴다’는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경구에서 따왔다. 만고의 성과는 물처럼 흩어져 버리고 작은 허물만 주홍글씨처럼 각인되는 세태의 안타까움이 담긴 은유다.

▷읽다 보니 ‘맞아, 대작이란 이런 것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처음엔 우남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맞춰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파고들수록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처한 역사적 환경과 사건을 꼼꼼히 전달해 독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그를 짐작하도록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소 길어진 측면이 있습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한 줄로 정의한다면요.

“자신이 태어난 중세사회에서 단숨에 현대사회로 건너뛴 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형성한 사건들은 우남의 눈을 통해야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남의 창을 통해서 역사를 봐야 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최대 공적은 무엇입니까.

“보통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꼽습니다. 하지만 저는 패망을 맞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는 한반도가 러시아 식민지로 편입될 위기를 막아낸 점을 들고 싶어요. 우남은 조선을 소련에 넘기려던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의 1945년 얄타회담 묵계(비밀합의)를 폭로했습니다.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한 임시정부 외교관이었지만 대범한 전략으로 강대국을 압박하는 데 성공했어요. 미국과 영국이 묵계를 부인함으로써 한반도를 삼키려던 러시아의 야욕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운명이 바뀐 결정적 순간이었죠.”

▷문장과 시선도 좋지만, 방대한 국사·세계사 공부와 철저한 고증이 돋보입니다.

“역사는 스무 살 무렵부터 파고들었습니다. 많은 사료를 뒤졌고, 앞선 헌신적인 연구자들의 성과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해외 자료 확보에 구글링도 큰 힘이 됐습니다. 예컨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당시 미국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구글링을 통해 극적으로 자료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과 실무협상을 한 미국 특사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의 보물 같은 마지막 인터뷰였죠.”

▷자료가 확보돼도 ‘이승만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건 힘든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우남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미국에서 살던 집 서재와 계단이 남향인지 동향인지까지 꼼꼼히 검증했습니다. 그 풍경과 시대 속에 우남을 정위치시켜 놓으면 비로소 우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안창호 선생 등과 대립하고 임시정부에서 따르는 세력이 많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 아쉬운 역사인데, 세 가지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안창호 중심의 서북파(평안도 출신)와 이승만 중심의 기호파(경기·충청) 간 파벌 대립이 극심했습니다. 다음은 국제정세를 꿰뚫는 이승만의 생각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벅찼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은 이승만이 임시정부가 기대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능통하지 못해서였습니다.”

▷이 책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희망이 안 보이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이승만의 삶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망명 임시정부 대표지만 돈도 국적도 여권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해가며 독립투쟁을 했습니다. 쉬 가늠하기조차 힘든 회의와 절망을 견뎌냈을 것입니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현시대의 어려움은 하찮게 여겨지지요. 우리는 절망할 권리도 없다는 걸 느낍니다.”

▷이승만기념관 건립이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조언을 하신다면.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 기념관에는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잘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도 초등학생들이 견학하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합니다. 할아버지가 손주 손 잡고 둘러보면서 ‘그땐 이랬고 나는 이런저런 역할로 역사와 함께했다’고 자랑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 1부를 마친 건데, 2부 3부 집필 계획은 어떻습니까.

“독립투쟁에서 귀국까지의 1부 작업에 7년 걸렸습니다. 사실 1부가 가장 쓰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후는 사료가 훨씬 풍부해 맥락을 짚어주는 데 더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2부는 ‘건국편’으로 해방을 맞은 1945년 8월부터 성공적인 두 번째 총선을 치른 1950년 5월까지입니다. 3부는 6·25 전쟁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까지로 ‘호국편’이죠. 2·3부 완성은 합쳐서 7년 정도 보고 있습니다.”

▷필생의 작업으로 보이는데 우남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문학적으로는 분명 큰 손해죠. 역사소설은 쓰기는 무척 힘든 데 비해 문학계나 문화판에서 안 알아주고 보상도 적습니다. 애국 진영에서 이승만을 써달라는 요청이 많았고 개인적으로도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컨대 매카시즘이란 말을 낳은 미국 조지프 매카시 의원의 영웅적 면모를 제시하고 논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나 외에 잘 떠오르지 않는 거죠. 우리 지성계의 뼈아픈 현실입니다.”

▷문단이나 지식계에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문단의 파이프라인 밸브를 이른바 진보 문인들이 완벽하게 장악 중입니다. 그들 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작품 쓸 때 보조금 하나 못 받고 살길이 막힐 정도죠. 6·15 선언(2000년)으로 남북 작가 교류가 본격화한 후 점점 심해져 이제 난공불락입니다. 저도 그들과의 교류가 사실상 끊어진 지 오래예요. 문인 교류차 방북하는 이들에게 “북한에 작가가 어딨느냐, 다 선전선동 요원들이지”라고 비판한 게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기울었나요. 청년층에선 분위기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달라질 걸로 봐요. 왜냐면 사람들에게는 ‘진지함에 대한 배고픔’이라는 게 있죠. 필립 라킨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계관시인이 쓴 표현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마음속에서 진지함을 갈구한다는 것이지요. 작가가 되는 건 근본적으로 그 배고픔이 있어서지요. 모든 예술가가 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끼리끼리 몰려다니고 정부 돈 타 먹다가도 언젠가는 올바른 뭔가를 찾아 나설 겁니다.”

▷요새는 윤석열 대통령도 극우로 몰리는 세태입니다.

“윤 대통령은 박정희 다음으로 과감한 분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재지 않고 합니다. 그런 분을 만난 건 우리나라의 운이 돌아왔다는 얘기예요. 사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분에게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과감함을 본 것이지요. 물론 위대한 대통령들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 풍모를 지닌 것 같습니다. 특히 대중 관계에서 그렇게 과감할 줄 몰랐어요. 진출 기업이 많고 걸린 것도 많아 중국이 보복하면 공안에 붙잡혀 갈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눈 딱 감고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 순항하지는 못하는 모습입니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가 불안한 게 문제죠. 어떤 사회학자가 통상 선진국은 반체제적인 인사 비율이 10% 정도인데 우리는 곱절 많다더군요. 내 생각엔 곱절이 아니라 세 배는 돼 보입니다. 30%쯤이죠. 거기에다 공영방송까지 대통령을 못 잡아먹어서 아우성이죠. 무엇을 해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비관적인 느낌이 커지는군요.

“바둑 명언에 이런 게 있습니다. 내가 잘 둬서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가 실수해서 이긴다고요. 소위 진보들이 계속 실책만 하고 있으니 너무 비관할 건 아닙니다. 독일을 비롯해 세계적으로도 좌파의 모습은 엇비슷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전체주의적인 모습이 뚜렷하지요. 그런 게 좌파 속성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투표에도 반영될 겁니다.”

▷이승만 연작 외에 구상하는 다른 작품이 있습니까.

“제가 과학소설가라 인공지능(AI)에 대해서 꽤 깊이 탐구해왔습니다. 여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공지능에 대해 하나 써야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AI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AI에 대해 가장 낙관적인 사람이에요. 인류에게 이대로 맡겨두면 스스로 멸망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AI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기술이 발전하면 상응한 정보 처리 수단이 나와야 문명이 유지됩니다. 그 정보 처리 수단이 AI입니다. 로봇이 인류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유치합니다. 그런데도 불안감이 확산하는 건 유치할수록 대중에 잘 먹히는 탓도 있을 겁니다.”

■ 복거일 약력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상대 졸업
△1987년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로 등단
△1992년 <파란 달 아래>(첫 하이텔 연재 전문작가 소설)
△1995년 첫 시집 <五丈原의 가을>
△2014년 장편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
△2015년 지식·무협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전 6권)
△2018년 장막 희곡 <프란체스카-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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