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李대리 노트

입력 2023-08-14 17:57   수정 2023-08-15 00:12

‘작은 거인’ 프로골퍼 김인경은 엄청난 기록광이다. 골프를 처음 배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써온 ‘골프 일기장’이 20권이 넘는다. 처음엔 결과만 적다가 커가면서 훈련일지가 됐다. 코스에 관련된 기록도 많다. 골프장마다 잔디가 어떻게 다른지, 대처 방법을 몰라 낭패를 본 기억도 낱낱이 썼다. 그는 골프 다이어리 한두 권을 늘 갖고 다니면서 이동할 때나 숙소에서 수시로 펼쳐본다고 한다. 메이저 4승 위업의 숨은 비결이다.

미국 현대미술의 대표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부인 조세핀 호퍼다. 호퍼 전시회를 보러 가는 사람들에겐 조세핀이 기록한 ‘작가의 장부’ 또한 볼거리다. 작품 배경·작가의 의도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 기록이 3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평생을 티격태격하면서도 80대까지 해로한 부부는 한 사람은 그림으로, 한 사람은 기록으로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기록은 개인의 성장판이자 인류 발전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창의적 인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만4000쪽의 노트를 남겼다. 아이디어 스케치, 발명품 설계도는 물론 요리 레시피까지 있다. 근대과학의 선구자 아이작 뉴턴의 기록물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난중일기>는 한국인의 가장 위대한 기록물 중 하나다.

한국의 자동차산업도 한 개인의 기록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국산 1호차 포니 개발의 주역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의 이른바 ‘이대리 노트’다. 1974년 현대차 대리였던 그는 포니 설계를 맡은 이탈리아 이탈디자인에 파견 갔다. 처음엔 언어도 디자인도 제대로 몰랐지만 이탈디자인 설계진의 작업 과정과 설계실 내부의 변화를 보고 느낀 그대로를 매일 기록했다. 10개월 동안 노트 3권이 빽빽이 채워졌다. 돌아와 복기하니 포니 차체 개발의 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세계 디자인상을 휩쓰는 현대차 설계 사무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전 사장은 정주영 창업 회장의 도전 DNA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라도 일단 부딪쳐 보는 ‘해봤어?’ 정신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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