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험대에 선 기업가 [정삼기의 경영프리즘]

입력 2023-08-16 11:05  

이 기사는 08월 16일 11:05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인도에서 45도 더위에 100명 숨져”, ”미국 남부와 중국 베이징, 남미 에콰도르에 슈퍼 엘리뇨 공습으로 올해 글로벌 경제 최대 위협”, “세계 평균 기온이 17도로 역대 최고치 기록하고 슈퍼 엘리뇨로 더 오를 전망”, “도로가 흘러내린다 OMG! … 전에 없던 기현상에 (미국의) 국가적 긴장”, “지상낙원이 잿더미로…하와이 63년만에 최악 재앙”. 지난 두 달 동안 언론에 등장했던 헤드라인입니다. 태평양 동쪽은 가뭄과 고온, 태평양 서쪽은 홍수 등 극단적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남부와 유럽 남부는 폭염으로 끓어오르고, 미국 동부와 인도, 한국은 물폭탄이 터졌습니다.

이상 기후는 경제에 직격탄을 날립니다. 가뭄으로 파나마 운하 물동량이 제한되며 물류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전력난으로 제조업 가동도 중단되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홍수, 태국과 베트남에서는 가뭄으로 쌀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커피, 설탕, 쌀 등의 가격이 급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어컨 사용 급증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였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유럽은 이번 여름에 열돔으로 고생했지만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로 천연가스 가격이 또 뛸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상 기후로 경제적 손실이 사상 최대 규모라며 기후위기발 물가 인상과 긴축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합니다.

이런 위기에 대해 과학자들은 기술을 동원하여 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난 3월 UN 기후보고서에서 기술은 준비되어 있으니 투자와 상용화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놓았습니다. 풍력과 태양열 에너지 사용 확대, 화석연료와 쓰레기에서 배출되는 탄소 배출량 감축과 인프라 투자 확대, 탄소를 포집하는 자연 생태계 보호, 운송과 가정과 산업의 에너지 사용 효율화가 그 골자입니다.

경제계와 과학자들의 우려와 주문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저개발국가들에게 세계 기구와 유명인사들의 목소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딴 세상 얘기로 들립니다. 턱없이 부족한 재원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들은 한정된 재원을 감염 예방을 위한 보건의료와 양질의 노동력 확보를 위한 교육에 쓸 것인지, 아니면 청정에너지 전환을 위한 전력망 구축에 쓸 것인지 고민합니다. 전자는 단기적인 빈곤 퇴치에 후자는 장기적인 재앙 방지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 국가는 당연히 눈앞에 닥친 생존을 위해 전자를 택할 것입니다.

선진국과 중국 등 신흥국은 저개발국과는 다릅니다. 당장의 생존보다는 장기적인 재앙 방지를 우선시합니다. 먹고 살만 하기 때문이지요. 각국 정부의 목소리가 일관되지는 않습니다만 지역별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이 가장 적극적이고, 미국은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오락가락합니다.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면서도 탈탄소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역설적이게도 중국입니다. 하지만 정부와 기업들이 항상 동기화되지는 않습니다. 기업들은 이론적으로는 장기적인 생존이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단기적인 성과에 내몰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업가들이 먼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업들에게 단기적인 성과를 채근하는 투자 세계에서 현재보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작년 초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목격된 생소한 풍경이 그런 예입니다. 당시 트럭 전광판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등장했습니다. 광고판에는 ‘래리 핑크는 누구인가(Who is Larry Fink)?’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을 유난히 좋아하고 빈곤에 빠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악마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핑크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락의 공동창업자이자 CEO로 올해 70세입니다. 그는 운용자산이 9.4조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경원이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굴리는 금융 역사상 보기 드문 거물입니다. 이 금융 제우스는 서구 선진국 18,000여개 상장사에 자금을 굴리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왜 악마로 내몰리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정치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보수 진영은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장려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후변화, LGBT 등에 목소리를 내는 기업들에 불만이 급증하며 압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미국 보수 진영은 소위 ‘워우크(woke)’를 질색합니다. 보수 쪽 표현을 빌리자면 워우크는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진보파들의 과도한 주장을 말합니다. 이 용어는 차기 공화당 대선 후보로 트럼프에 도전하고 있는 플로리다 주지사 론 드샌티스가 성 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디즈니를 비판하며 유명해졌습니다.

보수 세력이 격렬하게 각을 세우는 것 중의 하나가 기업의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를 의미하는 ESG입니다. 이들은 ESG 상당 부분이 헛소리라며, 기업의 성과를 비재무적인 요소로 평가하는 주관적이고 비일관적인 시스템으로 지표 간에도 서로 상충된다고 몰아붙입니다. 더 나아가 ESG는 사회 규범을 파괴하고 화석연료 업계를 죽인다며 비난합니다. 올해 미국의 37개 주 의회에서 ESG를 겨냥한 167개 법안이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산되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ESG에 관련된 블랙락의 투자는 3%가 채 안 됩니다만, 이마저도 2016년 이후 기업들에게 지속가능성을 높이라고 촉구하며 늘어난 것입니다. 보수 진영은 공화당이 장악한 주에서 강력한 로비를 펼치며 블랙락을 공격하였습니다. 실리콘벨리의 전설이자 보수 진영의 빅마우스 피터 틸은 한 행사에서 래리 핑크를 언급하며 “ESG는 증오의 공장”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진보 쪽에서도 블랙락이 ESG와 관련하여 하는 게 별로 없다고 공격합니다. 지금 핑크는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국가의 적 ‘엠마뉴엘 골드스타인’이 되었습니다.

핑크는 세계 각국의 최고경영자, 정부 수반, 중앙은행 수장을 거리낌 없는 교류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블랙락이 돈을 버는 기회를 포착해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10대 초반 사막에서 뱀을 잡아 팔다가 FBI 수사관들이 들이닥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자유로운 영혼의 학창 시절을 보내고 1970년대에 사모펀드업계 초년생으로 금융시장에 발을 내딛습니다. 1980년대에 부동산금융 시장이 뜨자 투자은행에서 모기지 트레이더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다가 엄청난 손실을 내기도 합니다.

핑크는 1988년 창업에 나섰습니다. 저비용 연기금과 장기 자산가의 돈을 채권 투자에 굴리려면 리스크관리가 핵심이었습니다. 모기지 트레이더로서 실패한 경험은 리스크관리 시스템에 그대로 녹아 들었습니다. 블랙락은 정교한 컴퓨터 시스템으로 고객 자산을 분석하였습니다. 수학과 컴퓨터 전문가를 동원하여 채권 포트폴리오의 개인 대출 상환 가능성을 계산하고 금리 변동에 따른 가치 변동을 측정하는 등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정교한 리스크관리 시스템은 훗날 핑크의 직관과 통찰력을 떠받치는 반석이 됩니다. 이젠 금융산업에서 리스크관리는 상식입니다.

핑크는 재산이 10억 달러로 세계 금융계 거물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위상과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에게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환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부동산 모기지 시장에 대한 통찰력, 큰 판을 움직이는 승부욕, 월스트리트 금융가와 워싱턴 정계를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작동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실 금융기관 인수를 통해 시장을 수습하는 ‘미스터 픽싯(Mr Fix-it)’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런 명성은 대서양 건너편까지 알려지면서 시장이 무너질 때 정부와 시장 간의 회로로서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는 오바마 정부 2기 때 재무부 장관 후보로 올랐으나 금융 외교관의 길을 택하며 블랙락과 자신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핑크에게 세계적인 금융 외교관으로서 전환점이 된 시기는 2010년대 중반입니다. 그에게 환경위기 대응이 곧 비즈니스 창출의 기회로 보였습니다. 특히 유럽의 연기금 등 자금을 대주는 고객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기금들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원합니다. 핑크의 모기지 트레이딩 경험은 향후 30년 동안 지구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 어떤 금융가보다 몇 발 앞서 기민하게 대응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 에너지 인프라 탈탄소화에 엄청난 신규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핑크와 블랙락의 전환은 특히 젊은 기업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정치권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습니다. 핑크는 CEO들이 기후위기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5년 파리 기후협약 이후 CEO들에게 보내는 연례서한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핵심 주제는 ‘지속가능성’이었습니다. 기업은 환경과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여 장기적 성장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복잡한 정치 기능에 기대기보다는 시급한 경제적·사회적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20년 연례서한은 중대 전환점으로 ‘기후변화’가 지속가능성의 핵심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형 석탄 기업 주식을 처분하고 화석연료 생산을 막겠다는 공격적인 ESG 전략을 발표합니다.

2017년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미국이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한 후에도 블랙락의 ESG 투자는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2018년에서 40억 달러에서 2022년 600억 달러로 증가하고 시장 내 비중도 5% 미만에서 20%로 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저탄소 기업들 특히 기술 대기업의 가치가 증가하면서 자산운용 규모가 10조 달러로 급증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기업가들이 일단 정치적 쟁점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정치인들 못지 않는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데, 핑크는 ESG 최전선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입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리스크관리로 정평이 나 있는 블랙락이 정작 ESG에 대한 정치적 리스크를 간과하고 있다는 겁니다.

2022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블랙락에겐 시련의 정점이 되었습니다.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 폭등으로 ESG 투자수익률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탈탄소 반대자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보수 진영의 유력 정치인은 화석연료 투자를 기피하도록 부추긴 핑크 때문에 석유가가 급등했다며 비난하였습니다. 급기야 2022년 8월 블랙락은 미국 기업 최초로 텍사스주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텍사스주는 에너지 기업을 기피하는 자산운용사에 대한 공공기관의 투자를 금지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블랙락은 작두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화석연료 기업들의 최대 투자자로서 미국 에너지 공기업에 1,70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고 항변했습니다. ESG 이니셔티브를 내세우는 것은 전적으로 고객에 대한 신의성실 차원으로 고객들이 장기 투자수익률 제고 차원에서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블랙락의 행보에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연례서한에서 ESG라는 용어가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탈탄소(decarbonization)’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CEO를 이사진으로 영입하기까지 했습니다.

블랙락은 올해 상반기 순현금유입이 전년 동기 대비 1,900억 달러 증가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핑크는 블랙락이 여전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로 여깁니다. 그는 지난 3월 스페인 출장 중에 위 경련으로 급거 귀국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유난히 우울하고 피곤하고 쇠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후계자를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핑크는 기업의 사명에는 잡음이 있기 마련이고, 비전을 지닌 거대한 기업에서 영구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세계 금융 제우스의 이런 모습은 소설에나 나올 법합니다. 국가와 기업과 소비자가 경제 주체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200여년 전 1차 산업혁명은 유럽의 성장 동력이었습니다. 100여년 전 2차 산업혁명은 미국이 슈퍼 강국으로 올라선 기반이 되었습니다. 모두 화석연료로 움직이는 시대였습니다. 21세기는 디지털혁명 시대라 하지만 여전히 화석연료의 중독을 떨쳐내기 힘듭니다. 당장의 가성비가 높고 기업으로서는 달콤합니다. 그런데 사실 장기적인 방향 설정의 주체는 정부였다는 게 200년 전, 100년 전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정부의 움직임에 기업가들은 곡예사의 길을 걷습니다. 지금은 정부와 기업 이외에 투자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거대 투자기관과 거물 금융가의 영향력은 어지간한 정부보다 커진 시대입니다. 그런 투자기관에 돈을 대는 곳은 연기금 등으로 연기금은 소비자인 대중의 돈으로 형성됩니다. 하지만 대중은 이차전지 기업 주식에는 밝지만 이런 생태계에는 어둡습니다.

우리나라는 국가의 성장 궤도를 초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모범 사례입니다. 개발도상 단계인 1980년대까지 심지어 1990년대까지 지금 저개발국가들이 하는 고민은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좀 먹고 살만한 이때 한정된 자원을 보건의료와 교육에 쓸 것인지, 아니면 기후위기 대응에 쓸 것인지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수준의 고민과 접근이 필요합니다.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국이 될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부와 대통령도 눈치를 볼 정도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기업과 금융가들이 즐비한 미국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기업과 기업가들은 고심이 더 깊어집니다. 정부의 역할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영화 ‘엘리멘탈’에서 불의 여자 엠버는 자연재해로 고향을 떠나 물의 나라로 이민을 갑니다. 엠버는 물의 남자 웨이드를 만나며 서로의 존재감에 눈을 뜨고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역대급 기상이변이 일어났다는 이번 여름 역시 지난 여름처럼 또 기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내년 이 때가 되면 또다시 찾아온 이상 기후에 모두들 1년 전의 에피소드를 끌어내며 아우성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잊을 것입니다. 영화 속 엠버와 웨이드의 조화가 그리워집니다.


※ 본 글은 The Economist의 2023년 7월 29일자 ‘The demonization of BlackRock’s Larry Fink’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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