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떠들썩한 하루키 신작…낯익은 매력을 뿜어냈다

입력 2023-09-08 18:28   수정 2023-09-09 01:07


“언제 적 하루키입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소설의 국내 출간에 즈음해 한 출판사 편집자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출판사도 국내 판권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루키는 하루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언제 적 하루키냐’는 의구심과 ‘그래도 하루키’라는 기대감,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받으며 지난 6일 한국에 상륙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4월 일본 현지 출간 때 벌어진 서점 ‘오픈런’, <파친코>를 웃돈다고 알려진 치열한 선인세 경쟁…. 국내 출간 전부터 이미 화제작이었다. 예약 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출판사 문학동네는 예약 판매 도중에 3쇄를 찍었다고 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키의 세계를 집약한 결정적 작품”이다. 이미 발표한 단편소설을 40년 만에 다시 장편으로 고쳐 썼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인 ‘나’는 열일곱 소년 시절에 열여섯 소녀인 ‘너’를 만난다. 둘은 글쓰기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급격히 가까워지는데, 소녀는 진짜 자신은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에 있고, 주인공이 보고 있는 자신은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30대가 된 주인공은 소녀를 만나려고 도시에 간다. ‘진짜’ 소녀가 있는 도서관에서 그는 ‘오래된 꿈 읽기’를 한다. 소녀가 주인공은 ‘꿈 읽는 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하루키는 하루키다. 추상적인 내용에 800쪽에 가까운 압도적 분량에도 소설은 매끄럽게 읽힌다. 도입부 풋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간질인다. ‘나’가 ‘너’의 손을 바라보며 그 작은 손으로 어떻게 병뚜껑을 따거나 여름밀감의 껍질을 벗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이야기가 느슨해질 때쯤 등장하는 성적 묘사도 하루키답다.

그러나 기시감은 지울 수 없다. 약 40년 전 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의 자기복제란 인상이 강하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 읽기’를 한다.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된다는 설정도 같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에 대한 탐구도 이어진다.

애초에 다시 쓴 작품이다. 하루키는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표했다가 일부 설정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활용했고, 43년 만에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새로 선보였다.

2부부터가 진짜다. 현실 속 중년이 된 주인공이 어느 작은 도서관의 관장이 되면서 겪는 일을 그렸다. 고야스, 옐로 서브마린 소년 등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자와 나의 경계, 현실과 도시의 경계를 뒤흔드는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며 소설은 전작의 기시감을 다소 씻어낸다. 완벽하게 봉쇄된 듯한 도시에 균열을 내는 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코로나19를 겪으며 하루키가 새로 발굴한 이야기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1부가 200쪽이 넘는다는 것.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전개가 늘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공포로 위장한 도시처럼 1부의 벽을 넘어서야 이 책의 진면목을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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