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와인 첫 여성 총괄 "물감 섞듯 와인도 섞어야 명품"

입력 2023-09-21 18:29   수정 2023-09-22 02:42


호주 와인을 세계 시장에 알린 최초이자 최대 규모 와인회사, 세계 3대 와인회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170년 역사를 지닌 하디스다. 아콜레이드그룹 산하의 하디스는 그룹 전체의 뿌리이자 5대째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하는 간판 브랜드다. 하디스는 지난해 24대 총괄 와인메이커의 이름을 깜짝 발표했다. 헬렌 매카시. 영국 시골 마을 데번 출신인 40대 여성이다.

하디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와인메이커인 매카시는 37명의 와인메이커를 지휘한다. 호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포도밭을 관리하는 농부들은 물론 그해 작물의 생산량과 품질, 유통 전략 등을 모두 결정하는 역할이다. 이달 초 한국을 처음 찾은 매카시 총괄 와인메이커를 서울 청담동 르몽뒤뱅에서 만났다.
남녀를 떠나 감각 뛰어난 사람이 와인업계 이끌어
“와인을 만드는 건 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요. 팔레트 위에 놓인 여러 색의 물감(와인)을 어떻게 섞어(블렌딩)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작품)으로 만들어낼지 구상하는 일이니까요.”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88년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주했다. 1997년 애들레이드에서 와인 양조 학위를 딴 뒤 호주의 크고작은 와인회사, 와이너리 현장 실무를 거쳤다. 린드만, 윈즈, 펜폴즈 등 유명 와이너리에서 와인 양조를, 클레어밸리와 바로사밸리 등에서 전통적인 방식과 새로운 실험에 관한 다양한 감각을 익혔다. 그는 40대 중반에 와인업계를 잠시 떠나 경영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와인을 장인의 예술에 머물게 하지 않고 더 대중적인 것으로 소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와인산업에서 여성 비중이 크게 늘고 있지만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영과 회계 등의 능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더 넓게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단지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와인의 미래와 소비자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야 했지요.”

와인업계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깊이 뿌리박힌 대표적인 산업 중 하나였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 이후 미각이 변하기 때문에 와인업계에 종사하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와 그에 따른 편견이 있을 정도였다.

“남녀를 떠나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와인업계를 이끌어 왔죠. 와인의 역사를 만든 수많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디스는 여성과 남성 비중이 이제 45 대 55 정도 되죠. 제가 그 증거이기도 해요. 임신과 출산 이후에도 제 입맛은 변한 게 하나도 없거든요.”
“하디스는 어떤 와인이든 믿고 마실수 있다”

그가 하디스 사상 최초의 여성 총괄 와인메이커가 된 것은 이 와이너리의 역사를 알고 보면 더 의미가 깊다. 하디스 와이너리의 창립자 토머스 하디는 호주에 와이너리가 전무할 때 카베르네소비뇽 100%로 와인을 생산해 ‘호주 와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호주 최초로 영국에 와인을 수출해 지금도 하디스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와인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창립자만큼이나 상징적인 인물은 아일린 하디다. 토머스 하디의 조카인 톰 메이필드 하디와 결혼한 아일린 하디는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남편을 대신해 와이너리에 평생을 헌신했다. 아일린 하디는 쉬라즈, 샤르도네, 피노누아 등 다양한 품종을 여러 지역에서 소싱해 ‘지역 블렌딩’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성장시켰고, 영국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디스는 ‘최초’의 역사를 지닌 브랜드죠. 창업 그 자체가 대단한 도전이었고, 아일린 하디의 헌신에 힘입어 호주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882년 보르도에서 호주 와인 역사상 최초로 국제와인품평회 금메달을 딴 데 이어 9000여 개의 상을 받았어요. 저는 그 유산을 잇기 위해 새로운 시도와 전통을 지키는 데 몰입하고 있습니다.”

하디스는 어떤 와인이든 믿고 마실 수 있다는 신뢰가 있다. 토머스 하디, 아일린 하디, HRB(Heritage Reserve Bin), 틴타라, 스탬프 시리즈 등으로 일상에서 편히 마실 수 있는 와인부터 최고급 와인까지 모두 생산한다.

“하디스는 지역 블렌딩과 다양한 포도밭을 갖고 있는 게 장점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병을 고르더라도 최상의 품질을 보장하는 게 우리 전통이죠.”

그는 자신만의 양조 철학을 묻자 “‘인간의 손’이 가장 적게 닿게 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와인메이커는 와인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세심하게 주의해야 하지만 자연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라는 얘기였다.
“요즘은 와인 포장 등 지속 가능성 확보에 관심”
매카시는 한국 소비자들이 매우 젊고, 열정적이라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모든 아시아 국가를 통틀어 미각이 가장 예민하고, 까다롭게 와인을 고르는 모습에도 놀랐다고. “호주 와인은 밝고 편안한 쉬라즈만 떠올리지만, 그보다 훨씬 다채롭고 성숙하고 진지한 와인이 많습니다. 한국의 와인 소비자가 그걸 알아봐주는 것 같아서 더없이 반갑고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국가입니다.”

요즘 그는 기후 변화로 인한 지속 가능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호주 전역 포도밭과 연관된 하디스는 매년 그 변화를 체감한다. 지금 내린 결정이 수십 년, 수백 년 뒤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탄소중립은 물론 포장의 형태까지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어요. 유리병이 아니라 납작한 750mL 페트병, 100% 재활용된 소재로 100% 재활용할 수 있는 용기에 담아 파는 와인도 선보이고 있죠. 와인을 병째 실어나르는 것보다 오크통으로 운반하는 것이 더 환경친화적이기도 해서 병입 공장을 영국 등 세계 각국에 세우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논리입니다.”

20대 초반에 와인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달려온 그가 여전히 와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와인은 끊임없이 놀라게 합니다. 아마도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겠죠.”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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