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는 그런 물리학자를 부러워한다. 경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신묘한 공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포탄을 쏘면 어디에 떨어질지를 척척 예측하는 물리학자를 보며 금리 0.5%포인트를 올리면 성장률이 얼마나 떨어질지를 예측하려 애쓴다. 그런 시도, 성공한 적 별로 없다. 그래도 공식을 남발해가며 지나간 사건은 얼추 설명해내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국면에만 들어서면 여전히 질퍽댄다. 오죽하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경제학자의 헛소리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까! 이 와중에 경영학은 경제학을 부러워한다. 그나마 과거라도 얼추 설명해내니까. 경영학이 하는 과거 설명은 너저분한 데다 의견 일치도 잘 안된다. 이렇게 말한다고 질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도 경영학으로 학위를 했고, 팔은 안으로 굽는 게 지극히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이니까. 상황이 이런데도 경제경영학자들은 자기들이 사회 ‘과학’을 하고 있다고 우긴다. 더 걱정되는 건 ‘과학적(的)’이라는 말만 붙이면 자기 주장의 설득력이 자동으로 높아진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실이다.
그래서 ‘과학’이란 게 무엇일까? 오래전, 카를 포퍼가 이런 논란을 대충 수습한 바 있다. 과학은 ‘반증 가능성에 열려 있는 학문 체계’이고 과학 이론은 ‘반증이 가능한 주장’이라는 명쾌한 논리다. 뉴턴-아인슈타인-양자물리처럼 실험이든 관찰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기존 이론이 틀렸다는 반증과 비판을 할 수 있고, 그런 반증과 비판에 개방적이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끝없는 우주를 탈탈 털어가며 조사해서 어느 구석에도 안 계신다는 게 깔끔하게 확인돼야 반증이 가능하니 과학적이라 하기 어렵다. 참, 거짓을 떠나 그냥 과학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반면 ‘스완(백조)은 하얗다’는 주장은 어디서든 검은 놈 하나만 발견하면 반증이 성립하니 과학이다. 결국 호주에서 검은 놈이 발견됐다. 그런 반증에 열려 있어야 과학이니 과학자에겐 내 주장이 확고부동하다는 억지가 가장 큰 금기다.
그런 포퍼를 깊이 흠모해 그의 철학을 공부하려는데 생활비가 걱정인 제자가 있었다. 잠시 포퍼의 관점을 활용해 투자를 좀 하기로 작정했는데 생활비로는 감당이 어려운 수준으로 돈을 벌어버렸다. 그 학생, 이름이 조지 소로스다. 둘 다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다. 그들처럼 자기 주장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을 장착한 태도와 그런 학문 시스템을 과학이라 한다면 자주 틀리는 사회 ‘과학’도 과학일 수 있다. 물리, 경제, 경영으로 갈수록 연구 대상이 가만있지 않고 자꾸 꿈틀거리니까 명징하지 못할 뿐이다.
기존 이론은 공상적이고 우리 이론은 과학적 공산주의라고 대차게 주장한 게 레닌주의자다. 우리 주장이 ‘과학적’이니 입 닥치라는 태도다. 포퍼가 과학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그들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던 이유다. 그들의 ‘과학적’인 이론은 돈도 벌지 못했고 쫄딱 망했다. 우리도 그랬다. 유신 시절, 정부는 그게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가르치라 강요했다. 스스로도 동의 못하는 걸 억지로 가르치는 선생님의 처연한 표정이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하다.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많이 양보해도 한국적이지도 않았다. ‘닫힌 사회’였을 뿐이다. 그래서 ‘OO적’이라는 표현은 아직도 섬찟하다. 어찌 됐든 과학적이라는 건 ‘내 말이 맞다’란 뜻이 아니라 ‘나는 열려 있고 겸손하다’는 의미로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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