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안에 나를 가둘래요, 그럼 이렇게 재미난 일들이

입력 2023-10-15 13:23   수정 2023-10-15 13:24

긴긴 추석 연휴가 끝났다. 연휴 동안 많은 것을 했다. 먼저, 미루던 집 청소. 그냥 쓸고 닦고 설거지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던 서랍장을 꺼내어 뒤집어엎고 많은 것을 버렸다.
책장 정리도 했다. 겨울 솜 이불을 담아 두는 커다란 가방 두 개가 꽉 찰 만큼 많은 책을 골라냈다. 고구마 캐기, 깻잎 따기, 양봉장 돌보기, 추석 선물용 꿀 소분하기, 책 읽고 글 쓰기, 산책하기, 모자 쇼핑, 오랜만의 가족들 집 방문, 고양이 목욕, 농구하기, 요리하기…….
연휴에는 쉽사리 지치지도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밤늦도록 축구 경기를 본 뒤 새벽같이 할머니네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10월 4일 수요일 새벽에는 잠에서 자주 깼다. 이제 곧 출근이구나! 출근을 앞두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나는 그 상태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많은 형식을 부여한다. 한동안은 ‘미소 주간’을 선정해 이번 주는 무슨 일이 닥쳐와도 일단 미소 짓고 보자고 다짐하기도 했고 (잘 안 되었다.) 또 한동안은 성경 구절을 붙잡고 초조해질 때마다 되뇌기도 했다.
이번 연휴 끝에 나의 형식이 되어 주었던 것은 축구선수 손흥민이 속한 팀 토트넘의 감독 엔제 포스테코글루의 승리 후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어떻게 선수들에게 효과적으로 동기 부여를 하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월드클래스 선수들을 상대방으로 맞을 때에는 용기가 당연히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축구에서 용기라는 것은 약간 오해받을 수 있는 요소이기 쉬운데 아무도 공을 받고 싶지 않을 때 공을 원하는 것입니다.”

지하철 맨 끝 칸 문 앞에 서서 나 또한 용기를 다졌다. 아무도 공을 받고 싶지 않을 때 공을 원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갖고 기꺼이 메일함을 열고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4시쯤 되자 연휴 중에도 틈틈이 맘 졸였던 일들이 그럭저럭 (일단은……) 마무리되었다.
나는 긴 연휴의 다음 날 나와 같은 용기를 내고 있을 친구들에게 엔제 감독의 인터뷰 캡처본을 전송해 주었다. 그렇게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력을 제공하는 그것이 바로 형식”(강보원, 「에세이의 준비」)이라는 말처럼 나 역시 스스로 부여한 형식으로부터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형식은 내게 그러하였듯 용기를 쥐여주기도 하고, 판판야 만화의 주인공에게 그러하듯 뜻밖의 장면들을 마주치게끔 하기도 한다. 판판야의 만화 『모형 마을』에는 뚱한 얼굴의 주인공이 스스로와의 약속으로부터 벌어지는 모험들을 최선을 다해 겪어 낸다. 주인공이 스스로 세운 원칙과 그로부터 벌어지는 사건 중 하나를 살펴보자.

원칙은 우연히 착륙한 곳에서 주민들에게 위치를 직접 묻지 않고 오직 주변 기물들만으로 이곳이 어딘지 추측해 보는 것이다. 주인공과 그의 동료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 불시착한 뒤 이제 그럼 이 산 이름이 무엇인지 추론해 보기로 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꼭대기에 커다란 깃발을 꽂아 두고 겨우 하산에 성공한 둘. 식당에서 주문을 하려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둘은 그 마을에서 몸으로 이런저런 일을 부딪쳐 가며 언어를 익히는 데 성공하고,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언어를 익혔으니 이번만 예외적으로 직접 물어보는 것도 “훌륭한 자력 조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협의에 이른다. 한 주민에게 묻자 그는 주인공과 그의 동료가 내려온 산의 이름이 ‘깃발 산’이라 답한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커다란 깃발이 세워져 그 이후로 ‘깃발 산’이라 부르고 있다고. 주인공과 그의 동료는 잠시 벙찐 얼굴을 해 보이고는 하던 식사를 마치고 산 정상에 주차해 둔 비행선 쪽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이름이 붙여진 ‘깃발 산’ 정상으로.

규칙을 정한 뒤 그에 입각해 쓰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때 규칙은 이상한 무늬가 그려진 선글라스와 같아서 그것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닥친 일과 풍경들이 달리 보이고는 한다. 연휴 끝에서 나의 어깨를 토닥여 준 엔제 감독의 인터뷰는 며칠만 지나도 점점 힘을 잃을 테니, 나는 이다음의 형식을 찾아 또 이곳저곳을 걸어 보거나 이것저것을 관람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또 달리 이어질 삶 글 사랑 친구 시간 들이 있겠지. 『모형 마을』 외에도, 판판야의 모든 만화에는 제힘으로 만들어 낸 형식으로부터 펼쳐지는 뜻밖의 모험들이 가득하다. 나는 판판야의 만화가 내게 용기를 심어 주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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