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은 가장 늦게, 해고는 1순위…느린학습자들이 마주한 암담한 현실

입력 2023-10-19 15:22   수정 2023-10-19 15:23



만 19세 이상 청년 느린학습자(경계선 지능인)에게 자립의 문턱은 너무나 높다. ‘느린학습자’란, 지능지수 70~85에 해당하는 이들로 낮은 인지능력으로 인해 학업, 대인관계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간단한 계산, 글과 말의 이해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학교폭력이나 사기 등 범죄에 쉽게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장애인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청년 느린학습자 약 90만 명, 치열한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한국초등교육학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3.59%인 약 699만 명이 느린학습자로 추정되며, 20~29세 느린학습자는 약 90만명이다. 청년 느린학습자들 역시 적정 나이가 되면 자립을 위해 취업 시장에 뛰어들지만 일반인들과의 경쟁에서 사실상 도태되고 있다.

20대 느린학습자 A씨는 국내 유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높은 학력으로 서류 전형까지 통과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10번 이상 면접을 봤지만 결국 한 군데도 합격하지 못한 그는 실패가 반복되면서 취업의 꿈을 접었다.

권오진 청년숲협동조합 이사장은 “예전에 청년 느린학습자의 취업을 위해 약 20명을 대상으로 직업교육 1년, 현장실습 6개월, 인턴 6개월까지 총 2년간의 교육을 시행했지만 단 한 명도 취업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며 “일반 기업에 취직시키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느린학습자는 해고 1순위다. 20대 느린학습자 B씨는 긴 노력 끝에 고양이 관련 자격증 3개를 취득해 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직장 동료의 험담에 시달리며 1개월 만에 퇴사했다. 이후 다른 회사에도 취직했지만 근무 도중 해고당하는 등 1~2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권 이사장은 “자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금전적인 부분이기에 취업환경 개선이 절실하다”며 “장애인을 고용할 때 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처럼 느린학습자에게도 고용 인센티브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느린학습자 관련 지원 체계로는 서울특별시, 광주광역시 등 지자체 조례뿐이며 법률이나 정책은 전무하다. 새로운 법제화 시도로 올 3월 허영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느린학습자의 자립 및 고용 지원 내용이 포함된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지만 지난 7월 경계선지능인 지원법 제정추진연대가 출범하며 입법 움직임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느린학습자의 실질적 자립을 위해, ‘휘카페’와 ‘밈센터’
느린학습자의 자립을 위해 곳곳에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는 조금 느리지만 따뜻한 ‘휘카페’가 있다. 이곳에서는 느린학습자 청년들이 만든 쿠키와 음료를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휘카페는 느린학습자의 부모들이 모여 ‘아이들의 취업이 어렵다면 우리가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카페를 직접 만들자’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지난해 8월 청년숲협동조합,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서울시립대 캠퍼스타운사업단이 협업해 1호점이 문을 열었고, 1년이 지나 지난달 서울시립대 중앙도서관에 2호점을 냈다. 현재 총 8명의 청년이 휘카페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다.

권오진 이사장은 휘카페가 단순히 돈을 버는 공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일주일에 이틀 일하려고 강원도 동해에서 출근하는 친구가 있는데 일해서 버는 돈보다 숙박비, 교통비가 더 든다”며 “그럼에도 출근하는 이유는 친구를 만나고 일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경험이 좋아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 문화, 언어 등 전반에 걸쳐 도움 받고 싶은 청년 느린학습자는 ‘밈센터(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를 찾아가면 된다. 밈센터는 지난해 6월 전국 최초로 설립된 경계선지능인 대상 교육 지원센터로, 느린학습자의 꿈을 밀어준다는 의미에서 ‘밈’센터라 불린다.

밈센터는 아동~청장년 생애주기별 교육과 자조 모임, 상담 서비스, 느린학습자 진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청장년 대상 교육에는 △생활 금융·경제 교육 △문해력 향상 △식물재배 △바리스타 이론 및 실습 △데이터 라벨링 등 평생교육부터 직업교육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포함된다. 이번해 상반기에만 334명(중복 수강 포함)의 청년이 교육을 수강했다.

이교봉 밈센터 센터장은 “대부분 느린학습자는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존감이 낮다”며 “사소하더라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느린학습자에게도 튼튼한 지원 체계가 제공된다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며 “밈센터가 느린학습자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조은정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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