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워' 외면받던 페어아일 스웨터, 英 왕세자 간택에 신분 상승

입력 2023-10-19 18:05   수정 2023-10-27 20:09


무섭게 작열하던 태양이 힘을 잃고 스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계절이 왔다. 곧 기온은 놀라우리만치 떨어질 테고 하나둘 옷을 겹쳐 입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멋쟁이들의 눈빛은 바스락거리는 울 스웨터의 까슬한 감촉을 되뇌며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한다.

푸르게 빛나던 이파리들은 조금씩 신선함을 잃지만 또 다른 아름다움을 얻어 찬란한 마지막 연회를 준비할 때다. 빠알갛고 노오란 단풍이 한층 폭신해진 햇살에 반짝이며 채도를 낮추고 사각사각 도란도란 입을 모으는 계절, 긴 침묵의 겨울을 준비하며 당분간 마지막이 될 자연의 화사한 초대에 응하기 위해 옷장에서 꺼내 드는 사랑스러운 니트 스웨터가 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놀라운 신분 상승을 경험한 옷이 아닐까? 그 주인공은 페어아일로 불리는 스웨터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어민들이 입던 스웨터
스웨터의 신분 상승이라고?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1922년 가을, 찬바람이 시작되던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의 유서 깊은 골프장 로열&에이션트GC에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위이며 당대 최고 인플루언서이자 미혼의 20대 후반 조각 미남 에드워드 웨일스 왕세자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잘생긴 얼굴과 멋진 스타일이 궁금해 구름처럼 모여든 대중 앞에 영국뿐 아니라 세계적 관심의 중심에 선 왕세자가 알록달록 촌스러운 스웨터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끝 북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외딴섬 동네, 페어아일로 불리는 작은 섬 어민들이 작업할 때나 입던 화려한 무늬 스웨터를 입고 등장한 것이다.

강력한 색 조합과 무늬로 누가 봐도 촌로의 후줄근한 작업복을 세계 최고 패셔니스타가, 그것도 존엄한 로열패밀리의 일원이 근사한 트위드재킷과 니커보커에 매칭하고 등장했으니 세계 미디어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골프 스코어와 그 밖의 일은 그냥 묻혀버렸고 모든 이의 관심은 세계로 전송된 알록달록한 스웨터에 쏠렸다.

고기잡이 말고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어 스코틀랜드의 흔한 양털을, 바다 건너 바이킹의 후손들이 전해준 기술로 발전시킨 생계를 위한 수단이던 뜨개질, 오밀조밀 모여 너덧 가지 컬러로 촌부들이 손수 뜨개질한 스웨터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 셔틀란트제도의 이 보잘것없는 작은 섬, 페어아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졌고 이 섬 주민의 경제 상황이 한층 나아지는 결과도 낳았다.
참전병사 귀향 선물로 … 美손뜨개 열풍시켜
존엄한 왕세자의 옷 입기 신공이 세계적으로 빛을 발해 제국의 변방에 사는 대영제국민에게 은혜가 베풀어진 셈이다. 이후 이 지역의 한정된 컬러로 제작되는 특정한 뜨개질 테크닉을 부르던 페어아일이라는 이름은 이 알록달록한 스웨터의 세계적인 인기와 함께 다양한 컬러로 짠 스웨터를 총칭하는 대명사가 되면서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필자를 비롯한 옷 애호가들에게 가을을 활기차게 열어주는 기분 좋은 아이템이 됐다.

1920년대 인스타그램도 틱톡도 없던 시절 반짝인기를 얻은 페어아일 스웨터가 어떻게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함흥냉면 면발처럼 질긴 인기를 유지하고 있을까? 그 점엔 여러 가지 추측과 논리가 있다. 가장 유력한 설로는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간 손뜨개 스웨터가 두 차례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귀향 선물로 한두 점씩 미국 땅에 전파되고 미국 여성들의 손뜨개 열풍과 함께 북미대륙 전체로 퍼지면서 1940년대 또다시 관심을 받게 되고 뒤이은 유명인의 착용으로 그렇게 명맥을 이어 왔다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 두 사람의 지극한 페어아일 사랑 덕분에 연주와 녹음 활동은 물론 일상에서도 두 사람이 페어아일 스웨터를 입은 사진들이 여태껏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논리다.

이 주장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에피소드로는 주제가와 함께 엄청난 히트를 친 1973년 영화 ‘추억(The way we were)’에서 1930년대 후반 유복한 금수저 대학생 역할로 등장한 로버트 레드퍼드의 멋진 페어아일 스웨터가 결정적인 인기의 촉매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셀럽들도 애용하는 겨울 필수 아이템으로
페어아일 스웨터의 세계적인 인기에는 랄프로렌이라는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다. 1967년 타이 브랜드로 시작해 전방위적 브랜드로 성장한 랄프로렌의 위상은 팍스아메리카나의 위력과 함께 세계로 확장됐는데 흔히 프레피 스타일, 혹은 아메리칸 캐주얼로 불리는 스타일에 없어서는 안 될 아이템으로 페어아일 스웨터의 이미지가 종종 활용됐고 많은 이에게 영국, 스코틀랜드를 넘어서 아메리칸 캐주얼의 필수 아이템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그렇게 잊혀질 만하면 마이클 잭슨이 입고 나타나질 않나, 영국 왕실에서(다이애나 왕세자빈과 현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빈), 또 잊혀질 만하면 미국 셀럽들이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자주 활용해온 페어아일 스웨터는 아마도 그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앞으로도 100년은 유지하리라 생각된다. 가을이 가진 어둡고 건조한 이미지를 날려버리고 싶은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페어아일 스웨터. 찬 바람이 불면 이유 없이 설레는 당신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한국신사 이헌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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