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대한민국 미래 위협하는 '간병비 폭탄'

입력 2023-11-10 18:09   수정 2023-11-11 00:56

인구 감소로 인한 저성장 위기는 요즘 국내 경제학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다. 얼마 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전 한국경제학회장인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가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논쟁을 벌였다.

이 교수는 지난 1일 ‘한은-대한상공회의소 공동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인구 감소가 한국 경제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인구가 줄어도 기술 진보와 노동력 질의 개선으로 1인당 생산량을 높여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 총재는 이 교수와의 대담에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견을 냈다. 근거로 든 건 바로 간병 문제였다. 이 총재는 “노인 봉양을 위한 사회보장이 충분하지 않아 부모가 아프면 직장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런 상태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생산성을 올리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경제부총리와 함께 거시경제 정책의 수장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 총재가 간병 문제를 주요 이슈로 꺼내든 건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간병 지옥’ ‘간병 파산’ ‘간병비 폭탄’…. 어느덧 우리 사회는 간병 문제를 이렇게 부른다. 실제로 모든 숫자가 이 총재의 우려를 뒷받침한다.

보건의료계에서는 환자 간병에 들어가는 사적 비용을 연간 10조원 이상으로 추산한다. 2021년 이진선 서울대 간호학과 박사 논문에 따르면 유급 간병인 비용과 가족들의 간병에 따른 노동손실 등을 합친 간병비 추계액은 2008년 3조~3조6000억원에서 2018년 6조9000억~8조원으로 10년간 배 이상 늘어났다.

간병비 부담은 최근 수년간 가속도가 붙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달 간병비(간병도우미료)는 전년 동월 대비 9.3% 올랐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5년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지난달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3.8%)의 세 배에 육박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하루 7만~9만원 하던 간병비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 감소 등에 따라 10만~17만원으로 치솟았다. 한 달에 최대 500만원 이상 줘야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건강보험 지원도 받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자리 잡은 중장년층 부양자도 허리가 휘는 수준이다. 간병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청년층, 이른바 ‘영 케어러’는 직장을 그만두거나 학업 또는 취업을 포기한 채 부모 간병에만 시간을 쏟아붓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준비할 엄두조차 안 나고, 파산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나는 효녀가 아니다’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수년간 아버지를 간병한 한 청년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답 없음. 아무런 답이 없음. 이게 답임.’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국내에는 18만4000~29만5000명의 영 케어러(18세 미만 기준)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에 이어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까지 노인이 되는 2040년 이후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대부분 한 자녀 또는 두 자녀를 둔 세대여서 자녀들의 간병 부담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정부도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요양·간병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요양병원 간병비 건강보험 급여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제는 재원이다. 간병비 급여화는 요양병원에 한할 경우 연간 2조~3조원, 전체 의료를 대상으로 할 때 연간 9조원 이상의 건강보험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 1조8997억원 흑자였던 건강보험은 내년(-3261억원)부터 적자로 돌아서 2027년엔 연간 적자 규모가 5조8265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건강보험공단은 내다봤다. 여기에 연간 간병비 급여화까지 시행되면 건보 재정은 더욱 급속히 악화될 전망이다. 이 때문에 건보공단은 간병비 급여화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재원 조달이 쉽지 않다면 영 케어러를 대상으로 한 지원 방안부터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은 영 케어러에게 돌봄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아동 및 가족법’에 따라 지방정부가 반드시 지역 내 영 케어러의 현황을 파악해 간병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간병 지원은 이제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가 됐다. 가뜩이나 저출산으로 시름에 잠긴 한국이 영 케어러의 간병 부담을 줄여주지 않는다면 1%대 저성장이 아니라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까지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런 답이 없다’고 일기장에 적는 청년들을 방치하는 국가엔 답도,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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