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 유럽에서 탄알과 화약이 일체화된 총알이 발명되기 전까지 전쟁터 병사들의 가장 큰 고민은 화약을 건조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습기나 비에 젖은 화약으로는 탄알을 제대로 발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금융업계에서 쓰이는 ‘드라이 파우더(dry powder)’라는 단어는 이처럼 바로 쏠 수 있는 실탄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벤처캐피털(VC)이나 사모펀드가 만든 펀드 중 아직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당장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다.투자업계에선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투자 이벤트에 대비해 경쟁사보다 더 많은 투자금을 비축해두거나, 포트폴리오 회사의 자금력을 보충해주기 위해 일정 비율의 자금을 유지하기도 한다. 투자 선순환을 부르는 긍정적인 측면의 드라이 파우더다. 반대로 대내외 변수 탓에 투자 대상을 정하지 못하고 갈 곳 잃은 현금이 쌓이는 경우도 생긴다. 현재와 같은 벤처투자 혹한기에 늘어나는 투자 대기 자금이다.
VC는 고위험·고수익 투자로 혁신과 경제 성장을 돕는 자금 공급원이다. 새로운 기술 등장과 산업 전환의 변곡점에서 한발 앞선 투자로 혁신을 지원하는 게 모험자본의 본래 역할이다. 현재의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는 VC의 선제적인 투자가 만들어낸 성공적인 결과물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 독주 체제를 구축해 가는 엔비디아의 출발점도 30년 전 VC의 200만달러 베팅이었다.
시장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계속 금고 속에 드라이 파우더를 쌓아둘 수는 없다. 만기가 설정된 벤처펀드 자금은 언젠가는 시장으로 흘러나와야 하는 돈이다. 끝이 없는 골짜기는 없다. 알짜 벤처·스타트업의 가치는 하락할 만큼 하락했고, 기대수익률은 오를 만큼 올랐다. 모험자본이 사라진 산업 생태계에선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의 압축적인 혁신성장을 지원했던 VC들이 다시 한번 힘을 보탤 차례다. 옥석 가리기도 정도껏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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