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보호주의의 시험대 [정삼기의 경영프리즘]

입력 2023-11-22 10:18  

이 기사는 11월 22일 10:1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10월 말에 믿겨기지 않은 뉴스가 났습니다. 미국 3분기 경제성장률이 연간 기준으로 4.9%라는 겁니다. 세계 최대 강국의 경제성장률이 이 정도라니! 반면 한국은 올해 1.4%까지 떨어지고 내년은 잠재성장률이 1.7%에 불과할 것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전망까지 나왔습니다.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 일본에서는 “한국은 끝났다, 0%대 추락은 시간문제”라는 ‘한국 피크(peak)론’까지 들고 나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1월 초 두 개의 헤드라인을 연달아 내며 세계 경제를 내다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중국 재개방입니다. 당시 중국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의 3년간 외부 세계에 빗장을 걸었습니다. 대부분의 외국 유학생들은 중국을 떠났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발길을 끊었습니다. 국제 행사에서 중국 과학자들이 사라졌고, 다국적기업들의 경영진들은 중국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월 8일 ‘제로(0)-코비드’ 정책을 포기하며 빗장을 푼 것입니다. 전 세계는 상업, 지식, 문화분야의 교류가 부활하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경제가 요동칠 거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두 번째는 보호주의입니다. 세계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미국이 그린 그림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후 미증유의 경제 통합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수억 명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서방 세계가 소비에트연방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자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환호했습니다. 2000년 중국의 등장은 자유시장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체제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녹색산업 보조금 지원을 앞세우고, 해외 공장을 자국 내로 공장을 불러들이고, 상품과 돈의 흐름도 제약되고 있습니다. 2023년 세계 경제에서 중국 재개방은 가장 고무적인 사건인 반면 보호주의 득세는 가장 어두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호주의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 세상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슈퍼파워 외에는 주연이 없고 나머지는 들러리나 갤러리에 불과한 듯합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3세계 중심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끼고 싶어하지 않는 100여개 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비동맹권의 목소리는 내부적으로 다양하지만 무시하기 힘듭니다. 무엇보다 무시못할 경제력 때문입니다. 25개 비동맹권국가를 지칭하는 ‘T25(Transactional 25)’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거나 미중 경쟁에서 중립을 유지합니다. 세계 인구의 45%를 차지하고, GDP 비중은 18%로 EU보다 큽니다. 경제력 외에도 무자비할 정도의 실용주의도 작용합니다. 이들은 세계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미국 주도의 체제가 퇴조하고 자유질서와 인권수호라는 서방 세계의 주장은 자기 잇속을 챙기고 비일관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제3세계권의 스타는 단연 인도입니다. 지난 6월, 모디 총리는 미국을 국빈 방문하였습니다. 인도는 국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석유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모디 총리는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며 극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인도는 이제 세계 최대 인구국으로, 전 세계에 1,800여명의 디아스포라가 활동 중입니다.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서방 세계의 헤게모니에 개의치 않습니다. 서방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실용적으로 대하는 반면이들을 의심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인도의 경계심을 지렛대로 삼아 인도에 접근합니다. 그 결과로 미국은 인도와 방위 조약을 희망합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지정학적 실리를 챙기고 인도는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베프가 되는 겁니다.

8월에는 중국이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연초에 재개방으로 엄청난 성장을 예상했던, 세계에 희망을 안겨주었던 중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이 3.2%에 불과할 거라는 겁니다. 2000년 세계 무대에 나서며 세계 경제의 엔진으로 10%에 육박하였던 성장률이, 적어도 5% 정도는 지킬 것으로 보았는데 이 정도라니…. 중국은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고, 소비와 투자, 수출이라는 GDP 트로이카가 모두 위축되었습니다. 급기야 1990년대 일본의 디플레이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성급한 분석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의 문제는 대외보다는 내부 요인이 더 큽니다. 시진핑의 권력 집중화가 그 핵심입니다. 중국의 경이로운 성장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뼈가 굵은 두터운 테크노크라트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는데, 이런 전문가들이 시진핑 충성파에 완전히 밀린 겁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리커창 전 총리가 그 예입니다. 미국을 상대로 한 경제패권과 군사갈등, 제로-코비드 실패 등 시련의 연속에서 그래도 믿을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의 합리적인 판단과 창의성 발휘가 실종된 것입니다.

이런 미국과 중국 그리고 새로운 스타 인도라는 빅 쓰리(3)는 나름의 지정학과 경제 논리로 각자도생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자유시장의 퇴조는 여타 나라에게는 더욱 암울하기만 합니다. 소위 말하는 ‘자국 중심 경제(homeland economics)’는 보호주의와 대규모 정부 보조금, 정부 개입을 축으로 합니다. 미국은 정파를 막론하고 보호주의야말로 개방 시장의 혼란에 대처하는 길이라 합니다. 여기에는 중국의 확장, 서방 세계의 일자리 축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위기 등도 어느 정도 작용합니다. 그리고, 청정 에너지 전환과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뿌린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심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보호주의 득세의 현실에서 시장은 생각보다 충격에 더 잘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019년에서 2021년 사이 미국 항구의 물동량은 11% 증가하였습니다. 2022년 독일은 가스를 러시아산에서 다른 것으로 신속하게 대체하며 자국민들이 동사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보호주의는 정부, 특히 인구고령화와 연금과 의료비용 부담이 만만찮은 선진국 정부에게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사실 자유무역이 아닌 정부 부채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보호주의 시스템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신속한 대처가 힘듭니다. 특히 탈탄소와 AI 전환은 정부가 주도하기에는 너무 방대합니다. 미국발 보호주의의 약발은 제한적인 면도 있습니다. 베트남은 중국 제품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중간 기지로 실리를 챙깁니다. 일본과 네덜란드도 첨단 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라는 미국의 으름장에 시늉만 낼 뿐입니다. EU 집행부는 반도체, 양자컴퓨팅, AI 수출 통제를 내세우지만 회원국들은 눈을 흘깁니다.

이런 때에 세상은 미국 연준 의장의 입만 바라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H4L(higher for longer)’, 즉 고금리 장기화 때문입니다.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겠다는 미국의 노력이 최근 결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금리가 더 오르기도 힘들지만 떨어지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30년물 미국 국채 금리는 5%, 마이너스였던 독일 10년물 국채 금리는 3%입니다. 심지어 일본은 10년물 국채 금리 1%를 포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코로나 팬데믹 때 살포된 막대한 정부 지원금 때문입니다. 미국은 일하지 않고도 깔고 앉아 쓸 돈이 여전히 1조 달러로, 이런 돈이 바닥나고 고금리가 지속되면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비가 줄어들면 그 다음엔 수요발 경기침체가 고개를 듭니다.

고금리 장기화는 기업에게도 부담이 됩니다. 대기업들은 팬데믹 때 넘치는 자금을 저금리로 조달하여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점차 이자비용 상승으로 이익이 줄어듭니다. 중소기업들은 더 고통스러운데,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파산이 늘고 있습니다. 풀린 자금으로 부동산 투자에 나섰던 금융기관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 모두 정부가 단기간에 엄청난 자금을 뿌린 소위 ‘슈가러시(sugar rush)’ 때문입니다. 슈가러시의 약발은 단발적입니다. 순간적인 에너지 극대화에는 최고이지만, 약발이 떨어지면 급속도로 무기력해집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IMF에 따르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재정적자는 GDP의 5%, 미국은 7.5%로, 200여년 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은 재무장관과 연준 의장 간의 힘겨루기가 한창입니다. 재무장관은 금리를 내려달라, 연준 의장은 그럴 생각 없다는 거지요. 연준은 미국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의 곡소리가 어떻든 정부의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 위험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금리 장기화는 기업들에게는 변화의 유인으로도 작용합니다. 거인들이 지정학적 패권과 경제적 실리로 얽히고설킨 아마겟돈에서도 조용히 플랜 B, 플랜 C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술과 생산성 향상입니다. 미국 인플레이션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는 것은 생성형 AI로 인한 생산성 향상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증가하면 기업의 수익이 증가하고 근로자들의 소득이 증가하면 고금리를 견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정부가 엄청나게 뿌린 돈의 부작용을 중앙은행이 잡는 데엔 한계가 있겠지만 기업들은 실물 산업의 가성비를 높이며 공급발 치유제로 물가를 끌어내리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기업들은 눈치가 빠르고 적응력이 정부보다 뛰어납니다.

그렇다면 2024년은 어떻게 될까요? 우선 선거 시즌이 열립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등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인 42억 명이 사는 70여 개 국가에서 대선 등 전국 단위 선거가 치러지며 정치 지형이 요동칠 겁니다. 중국은 거의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10년 아니 15년마다 바뀌는 절대권력 때문이고, 다만 미국 기조에 따라 조금 움직일 뿐일 겁니다. 미국은 트럼프 재집권이라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세계 최대 위험은 트럼프의 당선이라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국가인 중국은 예측가능성이 높고, 민주국가라는 미국은 예측가능성이 낮습니다. 떠오르는 스타, 세계 최대 민주국가 인도는 예측가능성이 높습니다. 실리 때문입니다. 또다른 변수인 중동은 종잡을 수 없습니다만, 트럼프가 돌아오면 경제적인 기회는 좀 생겨나는 반면 지정학적 리스크는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세계 경제 대통령이라는 미국 연준 의장은 안타깝게도 ‘미국 구하기’에 올인할 뿐이지 타국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수출 없이는 지속되기 힘든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보호주의 득세는 치명타입니다. 성장률은 낮으면서 인플레이션은 높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습니다만 보통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 다행히 낮은 국가 부채 비율 덕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에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물경제에 실효성이 없는, 슈가러시 처방은 위험합니다. 이런 때 문득 60여년 전의 경제 컨트롤타워가 떠오릅니다. 1965년 초대 경제수석은 두 명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예산 및 외환 담당과 실물 경제 담당을 따로 두어 경제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한국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먹고 살만해졌습니다.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고, 기업의 위상이 달라지고, 사회마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반면 지정학적, 경제적 환경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시기에 정부든 기업이든 액셀시트로 쉽게 현혹되는 지표에 너무 매몰되고 재정과 금융만 바라보면 이 안개를 걷어낼 수 없습니다. 진화적인 사고로 과거의 지혜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세기 초 미국 생물학계 영웅의 추악한 민낯을 까발리면서 상아탑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꿋꿋이 버텨내는 삶과 자연에서 조용히 생존해가는 아주 작은 생물의 존재의 이유와 소중함도 일깨웁니다. 지금 세계 경제 무대에는 미국, 중국, 인도라는 거대한 주연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본은 덩치는 크지만 의외로 주목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래도 현장 속 주연들, 특히 기업들은 크든 작든 어떻게든 자신에게 맞는 살 길을 끊임없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대왕고래와 민들레처럼 말입니다.

영화 ‘관상’에서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잃은 내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보았지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며 한탄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속의 오펜하이머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지휘하며 원자폭탄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지금 같은 혼돈의 세상이 없었다고 하나 세상이 조용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2024년을 앞두고 있는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경의 ‘뒤늦은 통렬한 깨달음’인지 아니면 오펜하이머의 ‘현실적인 그릿(grit)’인지 궁금해집니다. 현장에서 뛰고 있는 분들은 어느 쪽에 기울지 짐작이 됩니다만.


본 글은 The Economist의 2023년 10월 7일자 ‘Are free markets history? The rise of homeland economics.’와 11월 2일자 ‘The world economy is defying gravity. That cannot last.’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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