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도 OECD도 필요하다는데…정치 놀음에 표류하는 '재정준칙'

입력 2023-12-03 15:17   수정 2023-12-03 15:35


나랏빚이 급증하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재정준칙’이 표류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여야 할 것 없이 지역 개발, 현금 복지 등 매표(買票)입법에 골몰하면서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소위 ‘운동권 퍼주기법’이라 불리는 사회적경제기본법 처리 없인 재정준칙 통과도 없다는 입장이다. 미래세대에 빚을 물려주지 말자는 재정준칙이 국회가 정치적 거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기획재정부와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는 지난 11월 3차례 회의를 열었지만 핵심 쟁점 안건인 재정준칙은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소위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지난달 30일 열린 기재위 전체회의엔 오르지도 못했다. 오는 9일 21대 정기국회 종료일 전까지 경제재정소위에서 여야가 합의하지 못하면 연내 통과는 사실상 물건너간다.

재정준칙은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에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기금을 뺀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로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국가채무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60%를 넘으면 이 비율을 GDP 대비 2% 이내로 조이는 내용도 담겨 있다. 지난해 1000조원을 넘긴 국가 채무가 폭증하지 않도록 관리하자는 취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경제재정소위에서 재정준칙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43개 안건 중 39번째로 올라있다. 지난 23일 열린 3차 재정소위까지 35개 안건을 논의했다. 3차 회의에서 민주당은 서울 지하철 5호선을 경기 김포시까지 연장하는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할 수 있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단독 의결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국민의힘이 꺼내든 김포의 서울 편입 구상에 맞선 전형적인 매표 입법이다.

당초 이날 함께 논의될 예정이던 재정준칙은 나랏돈을 절차를 건너뛰고 쓰게 하려는 또 다른 국가재정법 개정안 통과를 두고 여야가 다툼 속에서 우야무야됐다. 국민의힘은 “예타 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입법 독주”라고 반발했지만 민주당의 시도를 재정준칙과 연계할 정도로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지도, 필사적이지도 않았다.

결국 처리되지 못하고 남은 재정준칙은 정치적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국회에 따르면 여야는 남아있는 쟁점 법안 3개씩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 놨다. 여당은 재정준칙을 비롯해 12년째 정부의 숙원 법안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발법), 감사보고서를 내야 하는 보조금 사업자 대상을 확대하는 보조금관리에대한법률 개정안을 남겨놨다. 야당은 친야 성향이 주류인 사회적 기업 등에 최대 연간 약 7조원(공공조달액 70조 원의 10%)의 재정을 몰아주는 것을 골자로 한 사회적경제기본법과 공공기관의 자산 매각 시 국회 통제를 받도록 한 공공기관의운영에관한법률 개정안 통과를 밀어붙이고 있다.

여당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3가지 중 재정준칙과 서발법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집권당이던 민주당이 추진했던 법안으로, 당시 추진안과 큰 차이가 없다. 실제 재정준칙에 내용에 대해선 기재위 내 여야 위원 간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최근 기재부가 필요시 서발법 적용 대상에서 의료 분야를 제외한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이 법 역시 민주당으로선 반대 명분이 없다. 그럼에도 여야 ‘공수’가 바뀌자 이들 법을 볼모로 잡고 입법 거래에 나선 셈이다.

기재부는 어떤 입법 거래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을 비롯해 어떤 법이든 재정준칙과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재정준칙 통과 여부가 민주당의 결단 여부에 달려있는만큼 계속해서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재정을 필요할 때 쓰기 위해선 경제 상황이 좋을 때 재정건전성을 지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재정준칙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정준칙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달 20일 펴낸 ‘2023년 한국 연례협의 보고서’에서 “재정준칙을 법제화하지 않으면 노인 부양비 급증으로 중앙정부 채무가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지난달 29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 “급격한 인구 고령화로 2040년 재정지출 압력이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상승할 것”이라며 “재정준칙을 시행해 재정 건전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재정준칙이 표류하는 사이 재정건전성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2020년 문재인 정부는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이내, 통합재정수지비율은 -3%이내로 관리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행 시기를 차기 정부 임기 중인 2025년부터로 설정한 뒤 확장 재정에 나섰다. 관리재정수지는 2020년 이후 3년 연속 100조 원 수준의 적자가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660조원이던 국가채무는 작년 말 1067조원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GDP대비 국가채무비율도 36%에서 49.4%로 늘었다.

윤석열 정부도 재정준칙 기준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기재부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관리재정수지는 70조6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가 제시한 연간 적자 전망치(58조2000억원)를 3분기 만에 훌쩍 넘겼다. 내년도 예산안에서 정부가 제시한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92조원으로 GDP의 3.9%에 달한다. 재정준칙 도입을 추진하는 정부조차도 스스로 제시한 기준인 ‘3%’를 지키지 못한 셈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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