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하루키의 오디오와 소설가의 방

입력 2023-12-15 17:39   수정 2023-12-16 00:03

고등학생 시절, 저녁 식사를 쏜살같이 마치고는 두 군데를 항상 들렀다. 레코드점과 서점이었다. 레코드점에선 기다리는 신보가 나왔는지 확인했고, 서점에선 음악 잡지를 챙겼다. 신보와 관련한 기사는 그 어떤 교과서보다 두 배 빨리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디오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음악 애호가의 오디오 소개, 탐방 기사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은 뒤 그때 탐방 기사에 나온 인피니티 스피커를 구입했다. 이렇게 나를 오디오의 세계로 이끈 건 잡지에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해박한 지식이 담긴 기사는 아니었다. 그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아니, 잘 찍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진이나 그림, 글엔 그 사람의 시선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관건은 거기에 열정이 투영돼 있느냐다. 당시 오디오 잡지의 사진과 기사는 광고를 위한 게 아니었다. 한 음악 애호가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음반 라이브러리와 손때 묻은 오디오가 전부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학창 시절의 기억은 가끔 유명인의 오디오 소개 글을 볼 때 다시 떠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다. 대학 졸업 후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가 글을 쓰게 된 이력을 가진 그는 무척이나 자유롭다. 여기엔 음악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오래된 재즈 레코드, 그만큼 나이 먹은 빈티지 오디오, 축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루키의 음반 컬렉션이야 소설이나 에세이에서도 종종 언급돼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수천 장의 재즈, 클래식 등 주로 LP를 수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잡식성이지만 재즈를 가장 좋아하며, 특히 1950~1960년대 재즈의 벨 에포크 시대 LP 컬렉터다. 그렇다면 오디오는 어떤 것을 사용할까? 처음 시스템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글을 쓰는 데 배경음악 정도로 사용하는 오디오가 아니다. 오디오에 진심인 사람의 시스템이다. 일본 잡지에 소개된 그의 시스템 목록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스피커는 탄노이 ‘버클리(Berkeley)’에 더해 JBL의 여러 유닛을 하나의 인클로저 안에 세팅해 즐기고 있다. 예를 들어 저역에는 JBL ‘D130’, 중역은 ‘2440’에 ‘HL89’ 일명 ‘하츠필드 혼’을 사용했고, 고역은 ‘2420’을 달았다. 캐비닛은 ‘4530’으로 최신 하이파이 스피커와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는 디자인과 소리를 내주는 인클로저다. 백로드 혼 방식에 커다란 후드에서 나오는 박력 넘치는 저역이 상상된다. 20세기 중후반에 나온 재즈를 듣기에 안성맞춤일 듯하다.

앰프는 의외로 현대적인 모델들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 아큐페이즈 ‘E-407’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하나는 진공관 앰프다. 독일 브랜드 옥타브의 ‘V40SE’다. 턴테이블도 두 조를 운용하고 있다. 하나는 토렌스의 명기 ‘TD520’. 벨트 드라이브 방식에 매우 넓은 플린스를 갖추고 있는 대형기다. 또 하나는 럭스만의 ‘PD-171A’라는 모델이다.

오디오 잡지나 TV 프로그램을 보면 온갖 값비싼 기기로 휘황찬란한 시스템을 운용하는 애호가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제품에 주인의 삶이 녹아 있을 리 없다.

반면 하루키의 시스템에는 그의 삶이 겹쳐 보인다. 소설 속에 나온 문장이 그의 음반과 오디오 한편에서 살아날 것 같다. 최고가는 아니라도 그 사람의 내면과 일상이 우러나오는 오디오 시스템. 가짜와 허세가 판치는 세상에 이런 진심은 누군가에게 신신한 감흥을 전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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