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극장과 비운의 무용수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입력 2023-12-21 17:28   수정 2023-12-22 11:09

요즘 트로트가 문화의 대세가 되었다. 노래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가수들의 활약으로 열풍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다. 한때 트로트를 하류 문화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면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 고전음악, 가요, 팝송, 가곡, 오페라 등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누리면 된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1926년, 경성역, 경성부청(서울시청), 조선총독부(구 중앙청), 경성신사 등 서울에 주요 건물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대경성’을 표방하며 서울이 크게 확장됐고 이 공간에 근대적인 문화가 범람했다. 서울 곳곳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했고 은행, 다방, 백화점, 극장이 속속 들어섰다.

1932년, 이명래의 동생 이순석에 의해 소공동 105번지 지금의 서울시청 건너편에 '낙랑파라'가 세워진다. 낙랑파라와 같은 다방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식민지의 어두운 밤하늘을 지성으로 밝혔다. 고전음악을 듣고 서구의 영화를 감상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성행한 ‘살롱’을 표방한 다방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조선의 땅은 식민지였으나 문화는 전위에 서고자 했다.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극장 한 모퉁이에서 신파극을 보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슬픈 처지를 배우의 연기에 오버랩하며 울분을 삼켰다. ‘신파극’은 일본의 가부키 등 고전극에 반해 새롭게 꾸며진 연극을 말한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신파극) 전용극장으로 충정로 1가 문화일보 자리에 있던 '동양극장'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동양극장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지연의 논문을 참고했다.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며 이제는 덩그러니 표석으로만 남은 동양극장을 글로 복원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공연장의 역사는 1902년 협률사로부터 시작된다.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 만든 판소리 중심의 전문 공연장이다. 이후에 광무사에서는 전통적인 판소리를 공연했고, 1910년대 연흥사에서는 일본인을 위한 가부키가 공연됐다. 1920년 인사동 입구에 조선극장이 생기며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개봉됐다. 1930년대에는 프랑스의 장콕도 주연의 영화가 상영됐다. 일제 강점기의 문화가 판소리나 국악 뿐이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최신 영화가 상영됐고 지식인들은 잡지를 통해 서구의 문화 사조를 접했다. 그러나 우리 자본에 의한, 더구나 우리의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은 없었다.

배우 신불출은 "아, 어이하여 우리 조선 민족은 극장 하나 건립할 힘도 없더란 말인가"라고 장탄식을 했다. 당연히 일본 경찰의 눈 밖에 나 한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다.

당시의 극장은 일본의 야쿠자와 결탁한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호텔 보이 출신 홍순언과 그의 처 배구자에 의해 우리의 극장이 들어선 것은 1935년이다. 충정로 1가 62번지, 지금의 문화일보 자리다. 홍순언은 그간 고생해서 마련한 점포와 의주의 집을 팔아 4천원(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은 7~8원)을 마련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진출한 야쿠자이며 대흥행사인 와께지마에게 읍소해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을 빌렸다. 극장을 지을 자본이 마련되자 공사장에서 먹고 자며 공사를 지휘했다. 객석이 무려 648석이나 되는 3층짜리 전문 공연장이다. 홍순언은 객석 수를 늘리기 위해 화장실을 하나만 설치 했다. 직원들이 화장실 수가 적다고 불만을 토로하면 홍순언은 정색을 했다. "극장에 연극을 보러 오지 누가 똥 누러 오느냐"라고 말했다. 이렇게 연극 전문 공연장이 충정로에 들어섰다. 그는 무엇을 믿고 극장을 열었을까? 아마도 이미 장안에 소문 난 무용가, 아내 배구자의 힘이 컷을 것이다.


극장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회전무대였고 창공벽(호리존트)까지 있는 최신식 설계였다. 무대장치를 맡은 원우전은 천부적인 소질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금강산 구룡폭포를 재현하기 위해 소방차를 동원해 천정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리게 했다. 특별 제작된 굴곡이 있는 유리 벽 위로 물을 흐르게 해서 폭포의 입체감을 재현했다. 무대바닥에 물이 넘치면 무대 아래 안 보이는 곳에서 직원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극장에는 연일 인파가 넘쳤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연극을 보기 위해 방을 잡았다. 당시 전차의 막차는 밤 11시 30분이었는데 극장에서 전차 운송을 담당하는 경성전기회사에 미리 연락해 극장 관객을 위한 특별전차를 운행하게 했다. 극장의 직원 수는 100명이 넘었고 고정 월급제였다. 극장에 소속된 작가들이 대본을 집필하면 '청춘좌', '호화선', '희극좌' 등의 전속 배우들이 연습해서 완성작을 무대에 올렸다. 희극좌는 준비된 대본 없이 내용만 미리 알려주면 애드립으로 관객들을 웃겼다.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 순번제로 지방 순회공연을 했고 그 수입 또한 만만치 않았다. 지방마다 공연 매너가 달랐는데. 평양 관객은 성격이 급했다. 배우가 무대에서 실수하면 깔고 있던 방석을 가차 없이 집어던졌다. 이것을 소위 "방석이 날랐다"로 표현해 공연장 배우의 실수를 재치 있게 표현했다.

동양극장이 성공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배우들에게 지급하는 안정적 급여였다. 총독부의 고등관 월급이 90원인 시절, 동양극장 배우들은 250원~300원의 월급을 받았다. 최고의 배우 황철이나 장안의 인기 극작가 임선규에게는 2000원~3000원을 특별히 지급해 집 장만을 도와주었다.

동양극장의 흥행에 한몫한 사람은 홍순언의 아내 배구자이다. 그녀는 무용연구소와 악극단을 이끌었다. 어여쁜 용모에 기막힌 춤 실력으로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람들은 무용가 최승희를 기억하지만 배구자는 잘 모른다. 왜냐하면 배구자의 고모 혹은 엄마, 배정자라는 여인 때문이다. 이완용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라 하면 이해될까? 동양극장의 설립자 홍순언의 아내 배구자(裵龜子, 1901~2003)는 배정자의 조카라고도 하고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딸이라고도 한다. 배구자의 삶도 배정자처럼 기구하다. 배정자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최대의 무용단 덴가쓰 예술단에 입단한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부적인 재능으로 덴가쓰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예술단 내에서 일본인에게 차별을 받았다. 일본 무용수들에게 꼬집히는 학대를 당했다. 평양 공연시 호텔의 보이로 있던 홍순언의 도움으로 덴가쓰에서 탈출한다. 그녀는 근대 발레의 효시 '빈사의 백조'를 공연한 무용가로도 기록된다. 혼자 힘으로 ‘배구자 무용연구소’를 설립한다. 홍순언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둘은 결혼한다. 홍순언은 아내를 통해 극장과 연예사업에 눈을 뜨고 동양극장을 설립한다. 배구자는 탄생의 비밀에도 불구하고도 우리의 전통 무용을 구체적으로 정립한 무용수이다.


"나는 처음에 생각하기를 조선이라는 곳에는 전혀 무용이라는 것이 없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렇지만 실제로 발을 벗고 일을 하여보니까 무용이 없기는 고사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벌써 어느 나라에도 지지 않을 만한 훌륭한 무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렇건만 우리의 무용은 왜 찬란하게 빛이 나지를 못합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의 훌륭한 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밤낮 남의 나라 춤만 숭상하여 그것을 배우지 못해 애를 씁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리 던칸이나 안나 파블로바 여사의 춤이 아무리 가치가 있고 또 유명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그들의 춤이요. 결코 우리의 춤은 되지 못하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고유한 춤을 연구해서 조선에 확고한 무용도(舞踊道)를 수립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가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금년부터는 특히 우리나라의 자랑인 조선 민요를 자꾸 무용화하여 무대에 올리는 동시에 우리 조상이 남겨둔 검무, 승무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가무극 같은 데에도 손을 대어 볼까 합니다" 그녀의 당찬 포부다.

배구자는 끊임없이 우리 무용을 연구해 무대에 올린다. 극장이 잘 나가던 1938년, 남편의 요절로 배구자의 운명도 꼬인다. 해방이 되자 무용계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10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들이 풍미한 1930년대는 문화적으로 일제의 압살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시대였다. 다방에서는 문인과 화가들이 모여 예술과 인생을 논하고, 극장에서는 배구자의 춤, 그리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신파극을 보며 식민지의 울분을 삭혔다. 다방과 극장, 문화의 두 바퀴가 절묘하게 경성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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