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넘이 단상] 연말에 죽음을 생각하는 까닭

입력 2023-12-29 18:31   수정 2023-12-30 00:18

얼마 전 오답률 99%라는 삼성 입사 시험 문제가 인터넷을 달궜다. ‘삶과 죽음’과 같은 관계인 단어를 고르시오. (1) 입다-벗다 (2) 여름-겨울 (3) 길다-짧다 (4) 흰색-검은색

선지를 훑어보다 문득 재작년 겨울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당직 근무를 하던 중 밤늦게 부고 기사를 부탁하는 전화를 받았다. 부친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달리하셨는데, 경황이 없어 뒤늦게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그해엔 그런 일이 참 많았다. 1주일 뒤 내게도 닥쳤다.

코로나 환자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허무했다. 어렵게 면회를 허락해준 병원 직원은 주차장 외진 공터의 철제 컨테이너로 가족들을 안내했다. 그곳엔 취조실처럼 책상과 노트북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노트북 속 CCTV 화면에는 눈을 감고 누워계신 할머니의 모습이 비쳤다. 병실까지 소리가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얼른 일어나시라고 소리쳤다. 귀가 아플 정도로 바짝 댄 수화기에서 “응”하는 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훈훈한 연말 분위기를 망치려고 일부러 우울한 얘기를 꺼낸 건 아니다. 한 해를 정리할 때면 많은 이가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은 어김없이 반복되고, 한 해를 정리하는 이정표가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해 바뀜을 체감하는 기준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바뀌어 간다. 학창 시절엔 새 학년 진급이 곧 나이먹음을 의미했고, 기자가 되면서는 기업 인사로 해가 저물어가는 걸 알았다. 부모가 되고부터는 아이가 기준이 됐다. 뒤집고 말하고 걷던 아이가 입학과 진학, 졸업하는 과정에서 해가 지나는 것을 체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삶이 아닌 죽음이 내 나이테를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와 선배가 그랬듯 나도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고, 그들의 추모식으로 또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가족의 황망한 죽음으로 나는 겪어보지 않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비로소 고개를 숙일 수 있게 됐다. 그날 이후 부고 한 줄 너머에 담긴 아픔을 생각하게 됐고, 단톡방에 전해지는 부음에 기계적으로 쓰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말 대신 위로의 말을 고르고 솎아내는 법을 배웠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그 상황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고작 몇 번의 경험으로 감히 인생을 논할 순 없지만,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인생을 위해 매달렸던 그 어떤 것도 지난 죽음과 다가올 죽음 앞에선 숙연해진다. 해를 보내며 애끊는 슬픔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이 옅어진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삶과 죽음’과 같은 관계의 말을 고르는 삼성 입사 문제의 정답은 뭘까. 예전의 나라면, 4번을 택했을 것이다. 생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까맣게 채워가는 과정이며, 죽었다가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검은색이 다시 흰색이 될 수 없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나는 2번을 고르겠다.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니었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듯 여름이 지나면 종국에는 겨울이 오고, 그렇게 순환한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을 치열하게 보낸 뒤 혹독한 겨울이 닥쳐야 생이 따뜻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 아닐까.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 맞이한 첫 연말, 거리의 불빛과 아직 치우지 않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유독 환하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실은 “응”이 아니라 ‘웅’하는 인공호흡기 소리였지만, 한 살 더 먹는 나는 슬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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