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비싼 글씨…추사도 한석봉도 아닌 안중근

입력 2024-01-04 17:58   수정 2024-01-05 01:24


지난달 서울옥션의 2023년 마지막 경매가 열렸다. 습관처럼 라이브 영상을 연결해두고 일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식어버린 미술시장의 열기에도 동료들은 경매마다 최선을 다하며 낙찰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지금의 한국 미술시장은 ‘바이어의 마켓(Buyer’s Market)’이 됐다. 좋은 작품을 좋은 조건에 사려는 ‘올드 머니’들의 장(場)으로 전환됐다. 오랜 경험과 자본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의 여유, 경쟁을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히 판단하는 그들의 안목은 최근 유입된 ‘뉴비 컬렉터’도 꼭 갖춰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날 내가 평소보다 열심히 실황을 보고 있던 이유는 정말 오랜만에 나온 안중근의 유묵(遺墨)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5년 만에 나온 것 같다. 미술시장에서 일한 15년 남짓 기간 안중근 글씨는 겨우 다섯 번 봤는데, 나올 때마다 주목을 받았고, 높은 금액에 낙찰됐다.

고미술에 관심이 뜨거웠던 10여 년 전쯤만 해도 그림에선 뭐가 제일 비싼지, 서예 파트는 어떤지, 도자기와 고가구 중에서는 뭐가 손꼽히는지 상세히 물어보는 어르신이 좀 있었다. 요즘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도 한번 기억해 두시면 상식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고미술 시장 ‘최고 중의 최고(top of top)’는 이렇다. 그림은 단연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 도자기는 달항아리 큰 것(40㎝ 이상), 아니면 청화백자 오조용충, 고가구는 왕실용으로도 사용됐던 강화반닫이, 그리고 서예에서는 오늘 말하는 안중근의 유묵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려니 하고 듣다가 ‘서예는 안중근’ 대목에서 다들 놀란다. ‘추사가 아니고? 한석봉이 아니고? 안중근?’ 이런 반응이다. 아직까지 아주 특수한 몇몇 경우(사료적 가치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작품들) 외에는 안중근의 글씨처럼 기본 수억원대의 가격이 형성된 서예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안중근 다음으로는 뭐가 잘 팔리는가? 시장에 꾸준히 수요와 공급을 일으키며 자리를 잡은 작가들(?) 중에서 거래량과 가격대를 고려해 꼽아보자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추사 김정희와 정치인들.


정치인들 글씨는 인기순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그리고 정치인은 아니지만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 그다음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그 아래로 더 꼽아보자면 소전 손재형, 위창 오세창, 그리고 담원 정인보 정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서예 가격이 처참해서, ‘추사체’ 말고는 가격이 떨어지고만 있다. 10년 새 다들 반토막이 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병철 창업주는 2000만원대,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는 1000만원대, YS와 DJ는 몇백만원, 그 아래는 일단 100만원에서 시작하거나, 아니면 그 밑으로도 거래된다.


BGM처럼 경매 실황을 틀어놓고 일하다가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어 화면을 보니, 이런, 이미 시작해버렸다. 이날 경매의 65번째로 나온 안중근의 유묵, 시작가는 5억원이었는데, 이미 경매사 뒤 현황판엔 9억원을 넘어 10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10억원! 이미 최고가 기록이었다. 요즘 경기도 어렵고, 서예의 인기는 날로 떨어져가서 한 7억원 정도 예상했는데, 놀라웠다.

‘대충 이 선에서 마무리되겠지’ 하고 밀린 일을 하는데, 뭔가 다음 경매작품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아니었다. 다시 화면을 보니, 아직도 치열하게 경합 중이었다. 5000만원씩 차곡차곡 15억원을 넘어 16억원으로, 한 걸음씩 힘겹게 17억원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눈을 뗄 수 없었다. 적은 돈이 아니기에 경매사는 응찰을 부추길 수도 없고, 반응이 빠르지 않다고 서둘러 끝내버릴 수도 없다.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부여해 한 계단씩 같이 올라가야 한다. 멋지게 해내는 후배를 보면서, 누군지 몰라도 ‘이기는 편 우리 편!’ 응원할 수밖에, 그리고 ‘20억원의 기록을 만들려나?’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낙찰가 19억5000만원! 놀라운 숫자였다. ‘20억원을 찍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그것은 딱 떨어지는 숫자에 대한 무의미한 강박이자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며, 불현듯 욕망의 근원에 대해 생각했다. 이 경합이 빚어낸 숫자와 그 속에 담긴 열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치열한 경합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달렸던 것일까?

이미 10억원일 때부터, 다시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투자의 효용은 없어졌다. 어쩌면 세기가 변해야 수지 타산이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돈 벌려고 사는 작품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를 그 어떤 이유로, 갖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결과다. 작품이 지니는 의미와 변하지 않을 가치를 소유하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그러니까 ‘19억5000만원’이라는 이 숫자는 작금의 시대에 영웅 안중근의 정신을 얻고자 하면, 지불해야 하는 값인 것이다. 그렇게 영웅의 정신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글씨, 가장 비싼 서예 작품이 되었다. 한국의 서예 시장에선 김정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이템이 정치인과 유명인에게 쏠려 있다. 그 가운데엔 명필(名筆)도 있고, 백범 선생처럼 독특한 필적의 글씨도 있으나, 인기(거래량)와 가격은 글씨를 잘 썼는지 못 썼는지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길어야 열 글자 남짓일, 그 짧은 휘호에 담긴 정신을 사는 거다.

그간 나는, 한자를 더 이상 문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에게 서예 작품은 추상화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통 서예의 외형적 세련됨을 이끌어내 서예 시장의 부흥을 꾀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이번 결과를 보며, 오히려 작품에 담긴 ‘정신’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의 자극이 전부인 지금의 미술시장에서, 보자마자 예쁜 것이 다가 아니라고, 그 작품에 담긴 의미와 그리고 그 의미를 낳은 근원적 정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영웅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다시금 알려주는 것만 같다.

이보름 가나문화재단·가나아트 기획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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