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페이지 27번" 라디오 트니 '섬뜩'…北 난수방송 뭐길래

입력 2024-01-15 10:07   수정 2024-01-15 10:14



#1 우리는 이미 침투해서 첫날 묵은 적이 있는 서대전역 근처의 여관에 다시 가서 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에 라디오를 통해 평양방송을 청취해서 숫자로 된 지시전문을 받아 밤사이에 그것을 모두 해독했다.

당시 북한으로부터 받은 방송지시는 ‘성공적인 침투를 축하한다는 것, 대상공작을 안전하게 잘하라는 것, 9월 15일 전으로 경기도 남양주군 능내리에 있는 무인포스트 장소에 침투 시 안내조와 약속한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 해안 접선장소 약도를 그려서 매몰하라는 것’ 등이었다.

#2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일 아침 6시 45분~7시 사이에 평양방송을 통해 접선신호 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평양방송 주파수(중파 657㎑)에 맞추고 약속된 신호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계획된 시간에 접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북한 공작부서와 공작조가 미리 약속한 제목의 노래가 나오면 당일 접선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노래가 나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접선을 한다는 뜻이다.


1995년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체포된 무장간첩 김동식의 회고록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간첩이 라디오를 통해 어떻게 지령을 받는지가 잘 나타난다. 특히 '평양방송'을 통해서 숫자로 된 지시 전문을 받아 해독했다는 대목은 '난수방송'이 실존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 지난 12일 오후부터 대남방송을 하던 국영 라디오 평양방송을 중단했다. 평양방송은 한국 주민에 대한 선전·선동을 목표로 1960년대부터 운영됐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물리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 178페이지 99번, 78페이지 40번…” 등 난수방송을 통해 남파간첩에게 지령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의문의 숫자... 난수방송 뭐길래
난수방송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난수방송은 무작위로 만들어진 수열인 난수를 암호로 이용해 특정 대상에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방송을 말한다. 듣는 사람과 암호를 대응하기 위한 미리 약속된 방법이 있어야 하고, 난수를 모아놓은 난수표가 필요한 경우도 있어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해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은 난수방송이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불 속에서 은밀하게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였다.

평양방송이 진행했던 난수방송은 처음엔 '평양의 큰아버지가 서울의 조카에게 보낸다'는 식의 일종의 오프닝 멘트를 붙인 뒤 숫자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송출됐다. '조카'가 지령을 받는 간첩을 뜻하는 암호인 셈이다. 이후 "2805호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수 12조, 조수 12조, 본문 부르겠습니다. 654, 48, 299..."는 식으로 숫자가 나온다. 이 숫자들과 그에 맞는 단어들을 조합하면 특정 암호가 나온다.

이 방송은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사라졌지만, 2016년 7월 돌연 재개됐다. 다만 이 때는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물리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며 특정 페이지의 문제 번호를 읽어주는 식이다. 난수방송이 시작되기 직전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 '고향의 봄' 같은 오프닝곡을 띄우고, 복습과제의 과목도 물리학부터 과학, 수학, 외국어, 화학 등으로 다양하게 나눴다. 당시 디지털 시대에 갑작스럽게 난수방송이 재개된 데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남 심리전'의 일환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또 꽤 최근까지도 국내 일부 지역에서 들을 수 있었던 북한발로 추정되는 난수방송 '앵무새'도 있다. 해외 난수방송 분석 커뮤니티 NSRIC에 따르면 2015년께까지 수신됐던 이 방송은 남파공작원 대상이 아닌 북한 인민군의 훈련용 방송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숫자를 읽은 뒤 '앵무새'라는 단어를 통해 방송을 끝맺고, 중간 중간 '락두산' 같은 단어를 섞는다. 락두산은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지명이다.

북한 외에도 난수방송 한다... 2020년 해프닝도
난수방송은 평소엔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지만, 이슈가 있을 때마다 몇 년에 한 차례씩 화제가 되기도 한다. 2016년 16년 만에 재개된 난수방송 때도 그렇고, 최근 평양방송이 중단되면서 과거의 난수방송이 언급되자 또 그랬다.

2020년엔 북한이 유튜브를 통해 난수방송을 재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8월 평양방송 유튜브 채널에선 숫자 조합으로 된 제목의 1분 5초짜리 음성 콘텐츠가 올라왔다. 영상 속에서 여성은 “친구들, 719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정보기술 기초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며 "564페이지 23번, 479페이지 19번, 694페이지 20번" 등 숫자를 불렀다. 이어 "지금까지 719 탐사대원들을 위한 기초복습 과제를 알려드렸습니다. 여기는 평양입니다"라고 마무리했다. 영상은 한때 조회 수 1만 회를 넘겼다가 몇 시간 뒤 갑자기 삭제됐다.

방송의 형태가 난수방송과 흡사해 북한이 유튜브를 통해 남파 간첩에게 지령을 내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통일부도 "북한의 SNS 관련 정보가 없어 파악하기 힘들다"고 했다.

다만 이 영상은 국내 한 보수단체가 과거 패러디용으로 만든 것과 똑같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다. 애초 평양방송이란 이름을 붙인 유튜브 채널이 공식 채널이 아닐 가능성이 컸고, 난수방송이 유튜브로 나온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난수방송은 북한의 전유물은 아니다, 한국도 난수방송을 자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북파 공작원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닌, 단순 대북 심리전 차원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밖에 키프로스, 동독, 쿠바, 베트남, 폴란 등에서 과거 난수방송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일반인이 난수방송을 청취하면 불법일까? 그렇진 않다. 어차피 사전에 약속된 지령이 없는 이상 해석이 불가능한 데다가, 전파라는 공공재를 이용한 난수방송은 모두에게 공개돼 있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는 처벌받지 않는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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