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정복자' AI, 神의 저주를 풀다

입력 2024-01-15 18:36   수정 2024-01-23 16:36


구약성서는 인류가 여러 언어를 쓰게 된 것을 신의 저주로 설명한다. 높고 거대한 바벨탑을 쌓으며 신에게 도전한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기 위해 언어를 여러 개로 찢어놓았다는 설정이다. 현존하는 언어는 7100여 개에 이른다.

<괴델, 에셔, 바흐>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외국어를 ‘반대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것’에 빗댔다. 언어의 다양성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데 투입해야 하는 노력이 몇 배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언어는 패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어권 국가들은 학계와 산업계, 문화산업 시장 등에서 ‘언어 허들’ 없는 패권주의를 누리고 있다. 1990년대 시작된 인터넷 보급이 영어를 세계 표준어로 만들었다. 글로벌 기술분석 업체 W3테크는 세계 주요 1000만 개의 웹사이트를 분석했다. 그 결과 영어로 정보를 제공하는 업체가 52.2%에 달했다.

인간을 울고 웃게 한 언어의 장벽은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질 전망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의 언어 정복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족 노인과 아라비아인 무슬림 소년이 자유롭게 대화하는 시대. ‘신(新)바벨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외국어 안배워도 AI로 프리토킹…"토익보다 사고력이 스펙될 것"

신바벨 시대를 불러온 것은 인공지능(AI) 기반의 기계번역 기술이다. 기계번역은 컴퓨터가 사람의 개입 없이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단어와 구가 아니라 문장 단위로 언어를 인식하는 인공신경망 기술 덕에 문법이나 어순이 달라도 매끄러운 번역이 가능해졌다. 업계에서는 1~2년 후면 사람이 어색함을 느낄 수 없는 정도로 AI 통·번역 수준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AI의 학습량이 늘어 오차율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어서다.
○게임 체인저 된 기계번역

이미 기계번역은 언어 장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글자 번역은 기본이다. 이미지에 들어 있는 텍스트를 인식하고 음성을 실시간으로 통역한다. 네이버, 구글 등은 카메라에 비친 텍스트를 실시간으로 번역하는 이미지 번역을 지원한다. 구글은 동시통역 기능이 있는 무선 이어폰 ‘픽셀 버드’를 내놨다.

삼성전자는 17일 공개하는 최신 스마트폰 갤럭시S24 시리즈에 온디바이스 AI를 활용한 ‘AI 라이브 통역콜’ 기능을 장착할 예정이다. SK텔레콤은 지난달 통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통역하는 ‘에이닷 통역콜’ 서비스를 시작했다. 구글은 2022년 안경을 끼고 있으면 상대방의 말이 번역돼 눈앞에 보이는 증강현실(AR) 글라스를 공개했다.

최근엔 사람 뇌파를 읽어 문자로 표현해주는 기술까지 등장했다. 호주 시드니공과대 그래핀엑스 인간중심AI센터 연구진은 작년 말 뇌파 측정 모자만 써도 속마음을 텍스트로 작성해주는 AI 기술 ‘브레인 GPT’를 발표했다. 언어라는 매개물 없이도 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얘기다.
○영어 사교육 시장에 직격탄
신바벨 시대가 본격화하면 영어 등 외국어 학습 수요가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 모국어만 잘 알아도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일본 등 대부분 비영어권 국가는 영어 교육에 큰 시간과 비용을 할애했다. 한국의 2022년 개정 기준 초·중·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영어 수업 시간은 787시간에 달한다. 사교육비의 ‘주범’도 영어다. 통계청 조사(2022년 기준) 결과 사교육비가 가장 많이 드는 과목은 영어로 한 사람이 한 달에 23만6000원을 썼다.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한 영어 사교육도 성행했다. ‘영어 유치원’은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지만 월평균 교습비가 작년 기준 123만9000원에 이른다.

박정호 명지대 경영대 특임교수는 “계산기와 엑셀의 대중화로 주산 선생님이 사라진 것처럼 외국어 선생님도 AI에 자리를 내줄 것”이라며 “이미 발음을 교정하고 자유 주제로 회화까지 가능한 AI 교사가 사람 교사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어 생태계의 정점으로 불리던 통·번역 분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2017학년도 7.43 대 1에 달하던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석사 과정 경쟁률은 2022학년도 4.91 대 1, 2023학년도 4.40 대 1로 급전직하했다.
○군소 언어 국가에 유리
국민연금공단은 지난해 말 10개 국어를 구사하는 AI 직원을 선발했다. 외국어가 AI의 영역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이런 움직임은 기업으로 확산할 전망이다. 외국어 능력자 대신 사고력과 협동 능력을 중시하는 기업이 많아질 것이란 분석이다. 박 교수는 “급변하는 시대에는 회사 매뉴얼을 뒤집어야 할 상황이 수시로 나타난다”며 “인력을 채용할 때 외국어 능력보다 사고력을 중점적으로 보는 트렌드가 확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전망이 나온다. 미국 언어학자 존 맥워터는 뉴욕타임스 평론에서 “대부분 인간은 어떤 언어로 말하는지보다 말하는 내용에 더 관심이 있다”며 “언어라는 ‘형식’보다 말에 담기는 ‘내용’에 더 집중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처럼 특수한 언어를 쓰는 국가에 기회의 문이 열린다는 관측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일본과 같은 소수 언어를 쓰는 국가들이 출판물, 영화, 강의 등을 전 세계에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게 된다”며 “언어 장벽 없이 콘텐츠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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