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선관위 편의가 선거 공정성보다 앞설 순 없다

입력 2024-01-16 17:54   수정 2024-01-17 00:44

지난 주말 끝난 대만 총통 및 입법의원 선거는 전형적인 아날로그 방식이다. 사전투표, 부재자 투표가 없고 휴일인 토요일에 호적지로 가서 투표하도록 돼 있다. 그러고도 투표율은 전자시스템을 채용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사전투표 도입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선거 개입 우려 때문에 엄두를 못 낸다. 개표 과정은 더 수동적이다. 기표관리원이 수작업으로 표를 하나씩 뽑아 들어 모두에게 보여주며 표에 적힌 내용을 소리 내 읽는다. 정당과 선거관리위원회 등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이를 눈으로 확인한 뒤 복창한다. 또 다른 기표관리원은 모두가 보는 곳에서 번호, 성명 등에 맞춰 표수를 바를 정(正)자로 기록한다. 기록지에 100표가 가득 차면 또 다른 관리인이 소리 내어 읽고, 주변인들이 이를 복창하며 결과 합산지에 기록한다.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고도 오후 4시에 시작한 개표는 7시께 개표율 60%를 넘었고, 8시가 되자 완전히 승패의 윤곽이 드러났다.

2020년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여전히 사전투표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양대 정당의 사전투표와 본투표 지지율 격차가 최대 16%포인트, 평균으로는 10%포인트 정도 벌어지면서다. 수만, 수십만 명에 달하는 동일한 유권자 집단을 기반으로 사전·사후투표의 성향이 이렇게 다를 수 없다는 통계학자들의 증언도 잇따랐다. 바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사전투표에 대한 불신은 근본적으로 본투표와의 시간적 간격, 장소 이동, 집표 방식 차이 등에서 연유한다. 과연 현행 사전투표가 본투표만큼 정확하고 공정하게 집계되느냐에 대한 의문이 핵심이다. 선관위도 이를 의식해 지난해 말 보완책을 발표했다. 올 총선에서 개표 과정에 사람이 투표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대만식 수검표 절차를 도입하고 사전·우편 투표함 보관장소에 설치된 CCTV 화면을 각 시·도 선관위 청사 내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관위가 사전투표용지 왼쪽 하단의 투표관리관 날인 자리에 현장 날인 대신 ‘인쇄 도장’을 고집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 미리 인쇄한 사전투표용지를 활용해 개표 결과를 왜곡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실제 몇몇 선거재판에서 엉터리 용지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행 공직선거법 158조도 날인을 명시적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사전투표관리관은 투표용지 ‘사전투표관리관’ 칸에 자신의 도장을 찍은 후 교부한다”고 돼 있다. 그럼에도 선관위는 자신들이 만든 공직선거관리규칙(84조)을 앞세워 인쇄도 합법이라고 주장한다. “사전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자신의 도장을 찍는 경우 도장 날인은 인쇄 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헌법기관인 선관위가 사무규칙을 제멋대로 법률보다 상위에 올린 꼴이다. 선관위는 이에 대해 지난해 10월 26일 인쇄 날인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헌법재판소 결정을 합법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사전투표용지 인쇄 날인에 대한 사건’으로 명명된 해당 청구 건은 위헌 결정 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이 무효로 될 수 있는 중대사안이었기 때문에 헌재가 관행처럼 내려온 인쇄 조항에 대해 차마 위헌이라고 판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헌이 아닐지라도 입법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권고도 있었다. 김형두 재판관은 당시 보충 의견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사전투표관리관이 사전투표용지에 직접 날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인쇄 날인보다 선거인의 대기 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이를 통해 부정선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면 선거 효율성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공정성을 더욱 도모할 수 있다.”

선관위는 사전투표 시간의 지연과 그에 따른 추가 인력 투입을 걱정하고 있지만 선거관리 편의성을 법률 준수나 선거의 공정성 확보 같은 가치와 동일한 무게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부정선거 논란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2000만 명의 대만 유권자가 단 하루의 선거일에 온갖 불편을 감수하면서 호적지를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 국민도 얼마든지 기다리고 협조할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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