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누가 주인이지?"…동굴같은 어둠 속 '말 그림'의 외침

입력 2024-02-12 17:24   수정 2024-02-13 00:27


동굴처럼 어두운 전시장. 칠흑 같은 내부를 손전등에 의지해 거닐다 보면 이내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그림과 마주친다. 성인(聖人)과 천사, 영웅의 형상을 금박으로 칠한 동유럽 종교미술 ‘이콘화(畵)’와 닮은 모습이다.

하지만 작품은 기존 이콘화와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다. 인물이나 휘장, 안장 등 인간의 흔적이 온데간데없다. 주인 없는 말 한 마리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처음 빛을 마주한 사람처럼, 그림을 본 관객은 낯선 광경에 당황할 만하다. 화면 속 말이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자, 이제 누가 주인이지?’

서울 이태원동 에스더쉬퍼에서 열리고 있는 에티엔 샴보의 전시는 이처럼 역설이 가득하다.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없고, 없어야 할 사물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콘화부터 설치미술, 조각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들며 기존 관념을 뒤틀어온 작가의 첫 한국 개인전이다.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의 작품은 퐁피두센터, 파리시립현대미술관, 루이비통재단 등이 소장하고 있다.

전시 제목은 ‘Prism Prison’. 빛의 궤적을 뜻하는 ‘프리즘(prism)’과 개인 또는 사회 집단의 감금을 상징하는 ‘감옥(prison)’을 연결한 말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둠 속의 관객은 손전등 빛을 비추는 순간 동물의 신체를 기존 인간중심적 내러티브에서 해방한다”며 “궁극적으론 우리 모두를 구속하는 제약과 통제에 대해 성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예술에 대한 통념을 지우는 데서 출발한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이레이저(Erasure·소거)’가 이를 보여준다. 여섯 개의 네온관으로 이뤄진 설치품이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선을 긋는 듯한 손짓을 연상케 한다. 관객의 입장을 가로막으면서도, 동시에 지도에서 보물의 위치를 알리는 ‘X’ 표시처럼 호기심을 자아낸다.

샴보의 작품은 자유와 통제, 주체와 객체 등 상반되는 주제 사이의 긴장감을 부각한다. 특히 2층의 ‘언테임드(Untamed)’ 연작에선 인간을 숭배하기 위해 제작된 기존 이콘화의 이미지를 뒤틀었다. 작가가 동유럽 곳곳에서 수집한 200~300여 년 전 이콘화를 변형한 결과다. 화면에 등장하는 동물의 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지웠다. 액자를 동일하지 않은 높낮이로 배치함으로써 인간한테 길들지 않은 동물이 뛰노는 모습을 극적으로 연출했다.

3층에 다다르면 해방과 역동의 메시지가 절정에 이른다. ‘지브로이드(Zebroid)’ 연작은 말의 몸을 조각내 접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친 조각이다. 분할되고 굴절된 형태가 정적인 사물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지브로이드는 얼룩말과 다른 말속 동물 사이에 태어난 교잡종이다. 줄무늬를 닮은 수직의 절단면은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는 야생 얼룩말을 떠오르게 한다.

한 가지 더. 전시장 곳곳에는 누군가 무심코 바닥에 버린 양말이 놓여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 양말이 아무렇게나 말린 모습을 청동으로 정교하게 주조한 작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명은 ‘토포스(Topos)’, 즉 진부하고 일상적인 사물이란 뜻이다. 작가는 “접히고 뒤집힌 그 형태는 복잡한 수학 공식이나 시공간 이론에서 널리 사용되는 주제”라며 “이처럼 단순한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었다”고 했다.

주변의 억압과 통제,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사고의 틀을 제한하고 있진 않을까. 동굴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사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익숙한 사물을 뒤틀며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전시 마무리에 걸린 ‘미러(Mirror·거울)’는 관객이 자기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전시는 3월 9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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