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가장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젠더 투쟁

입력 2024-02-16 18:56   수정 2024-02-17 00:54


화장실은 다른 어떤 공간보다 정치적이다. 2022년 성공회대와 KAIST에 국내 대학 처음으로 ‘성중립 화장실’이 생겼을 때 시작된 찬반 논쟁이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성별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성소수자 등의 권리 향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과 불법 촬영 같은 성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부딪치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성중립 화장실을 둘러싼 논쟁은 식을 줄 모른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젠더와 사회적 불평등을 연구하는 알렉산더 K. 데이비스가 쓴 <화장실 전쟁>은 사적인 공간인 화장실에서 펼쳐지는 공적인 정치를 탐구한다. 공중화장실의 발전과 여성 화장실 확대, 성중립 화장실 등장까지 미국 화장실의 역사엔 계급과 젠더의 갈등, 투쟁이 녹아 있다. 미국 이야기지만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화장실 논쟁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화장실의 성 정치화는 196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면서 본격화됐다. 여성에게 화장실은 차별을 경험하는 공간이었다. 직장에 여성 노동자를 위한 화장실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자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에 비해 일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심지어 남자 탈의실 안에 여자 화장실이 있기도 했다. 반려견을 위한 물과 사료를 보관하는 창고 등 열악한 환경에 놓인 화장실도 많았다.

노동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남성 노동자를 위해 설치한 화장실과 동등한 수준과 개수의 화장실을 여성에게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도 거세졌다. 마침내 각 주에 성별 분리 화장실을 의무화하는 법적 규제가 등장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노동 현장에 그치지 않고 교육과 공공시설 등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저자는 남녀가 구분된 화장실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고 분석한다. 엄격한 성별 구분에 따른 공간 분리가 성차별의 메시지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여성을 위한 화장실이 따로 필요하다는 논리는 여성의 몸이 나약하고 성적 약탈의 위험을 겪는 몸이라는 편견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해 화장실 정치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바로 성 소수자 운동이다. 그들은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경우 남성 혹은 여성 화장실을 선택해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주장했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사회 통념적으로) 남자다운 여성, 여자다운 남성은 공중화장실에서 괴롭힘이나 폭행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중립 화장실은 이렇게 탄생했다. 다만 기존 화장실을 성중립 화장실로 개조하는 비용 부담으로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이 구분되는 계급적 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화장실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발전을 거듭해왔다. 저자는 보다 평등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도 책에 담았다. 그들은 젠더 포용적인 공간이란 이미지가 조직 평판에 도움이 될 거라며 설득하기도 하고, 성중립 화장실이란 이름을 부담스러워하는 구성원을 고려해 가족용 화장실이란 이름을 붙여 더욱 포용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책장을 덮고 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화장실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앞에 서 있는 이 화장실 문이 어떤 질서를 강화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책이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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