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여년간 이승만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였다. 공과(功過)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그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비난 일색이었다. 종신집권을 시도한 독재자, 미제(美帝)의 꼭두각시,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퇴각한 '런승만' 등.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고, 미국에서 기념일을 지정하려 해도 좌파 단체들의 항의로 무산되는 것이 대한민국 국부(國父)가 처한 현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 다시금 시험대에 올랐다. '자유민주주의의 기수'로서 이승만을 조명한 독립영화 '건국전쟁'을 통해서다. 영화는 19일 기준 총 7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보수 성향 정치 다큐멘터리 흥행 1위에 올랐다. 지금껏 좌파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정치 다큐멘터리의 지형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다. '노무현입니다'(2017년·185만명)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길위에 김대중'(상영중·12만4390명), '문재인입니다'(2023년·11만6959명) 등의 기록을 넘어섰다.
'건국전쟁'의 이례적 돌풍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58·사진)은 20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단순히 이승만을 떠받드는 영화였다면 이런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저도 386세대로서 이승만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를 배우며 자랐죠. 그동안 학계와 미디어에서 조성한 이승만에 대한 왜곡이 사실이 아니란 충격에 많은 관객이 몰렸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기록을 담고 싶었다"는 그는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28세에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경력을 쌓던 중 받은 한 제보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북한으로 송환된 남편을 기다리는 루마니아 여성들이 있다는 것. 동유럽에 보내졌던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2020)이 그렇게 16년의 취재 끝에 완성됐다.
북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1995년 방북한 한 목사의 증언이 의미심장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이승만 정부를 타도하자'는 현수막이 북한 곳곳에 걸려있었다는 제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5년 서거했으니,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 뒤에도 북한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으로 남아있던 셈이다.
"북한이 여전히 '이승만 죽이기'에 혈안이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심지어 제가 대학 시절 배웠던 논리와 너무도 비슷했죠. 이후 3년 6개월 동안 이승만의 행적을 연구한 결과,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가 이승만 없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시대의 지성이자 외교적 선각자였던 이승만은 외로운 '건국전쟁'을 벌였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독립에 미친 늙은이'라며 비웃음당하던 그였다. 6·25전쟁 막바지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하루빨리 휴전하고 철수하려던 미군의 발길을 붙잡기 위한 복안이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독한 싸움은 계속됐다. 남북의 체제경쟁 속에 이승만의 업적이 북한에 의해 조작되고 폄훼됐다는 것이 영화의 입장이다.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 일당이 밀어붙인 것으로, 이승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부정선거의 여파로 발생한 4·19혁명 직후 침통한 표정으로 병원을 찾아 부상자를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영상이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독재자가 국민을 향해 총을 쏜 뒤 나흘 만에 병원으로 달려갑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독재자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속편에 대한 가능성도 내비쳤다. 현재 구상 단계인 '건국전쟁 2'(가제)의 부제는 '인간 이승만'으로, 정치인이기 이전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의 삶에 주목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 감독은 "'건국전쟁'에서 이승만에 대한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벗어내는 데 주력했다면, 속편에는 모범적인 활동과 선행 등 인간적인 에피소드를 담을 계획"이라고 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미국 워싱턴DC 한국전쟁기념비 비문에 이런 말이 있죠. 지금은 우리가 거저 얻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유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전쟁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유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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