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홍콩 ELS 손실 배상안, 정부가 왜 지침 내리나"

입력 2024-02-19 18:23   수정 2024-02-28 11:40


국내 경제학자 10명 중 7명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자에 대한 은행의 손실 배상안을 정부가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 차원의 배상안 마련과 별개로 은행이 ‘자율 배상’에 나서라고 금융당국이 지침을 내린 것도 부적절하다고 보는 경제학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정부가 일부 불완전 판매를 빌미로 투자자 책임과 시장 원칙마저 훼손하고 있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지적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10~16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주요 대학 15곳의 경제학과 교수 296명(초빙·명예교수 제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46명 중 31명(67.4%)이 ‘정부가 홍콩 H지수 ELS의 배상 기준을 직접 만드는 것’에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김재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의 배상 기준 마련이 피해 소비자를 보호하는 등 긍정적 측면이 있더라도 시장 원칙 훼손, 금융회사의 부담 증가 등 부정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며 반대 뜻을 나타냈다. 김성현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배상 기준은 (은행의) 위법 행위가 확인된 경우에만 법에 따라 제시해야 한다”며 “행정부가 임의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 배상안과 별개로 은행이 ‘자율 배상’에 나서라고 금융당국이 지침을 내린 것도 부적절하다고 보는 경제학자가 과반(52.2%)을 차지했다.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허겁지겁 자율 배상에 나서라고 한 것은 투자자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은행권이 2021년 판매한 홍콩 H지수 ELS 상품에서 올해 들어 확정된 원금 손실만 6000억원을 넘어섰다. H지수가 지금처럼 5500선을 밑돌면 올 상반기 원금 손실액은 5조원대로 불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ELS 배상은 법원이 판단해야…정부 개입은 시장 왜곡"
올해에만 7조원대의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은행이 일부 소비자에게 홍콩H지수 ELS의 손실 가능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불완전판매’ 정황이 있는 만큼 투자자의 손실을 은행이 어느 정도 배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은행이 투자자의 손실을 얼마나 분담할지 정한 배상안을 이달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안과 별개로 은행이 ‘자율배상’에 나서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이 같은 금융당국의 사태 수습 방식을 놓고 경제학계 안팎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의 이 같은 배상 압박이 실제 불완전판매 피해자와 단순 투자 실패자를 구분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불완전판매, 당국도 책임 있어”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10~16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에 있는 주요 15개 대학의 모든 경제학과 교수 296명을 대상으로 홍콩H지수 ELS 관련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에 응한 교수는 46명이다.

학계에서 가장 크게 우려한 부분은 정부가 홍콩H지수 ELS 손실 배상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직접 홍콩 ELS 배상안을 만들면 신속한 피해 구제가 가능하겠지만,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편향된 기준을 마련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완전판매라면 (투자자가) 위험을 인지하고 투자했기 때문에 (은행이) 배상할 이유가 없고, 불완전판매라면 감독 소홀의 문제가 있는 정부가 스스로 공정한 배상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지 여부에 의혹이 있을 수 있다”며 부적절하다는 뜻을 표했다.

이에 일부 교수는 배상 기준을 마련하는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법원이 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교수는 “정부의 배상안이 정치적인 시각에서 결정될 수 있으므로 불완전판매로 손실을 본 사람들이 소송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전주용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도 “개별 은행과 소비자가 민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32.6%(15명)의 응답자는 정부가 직접 배상안을 마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봤다. 김영한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ELS 투자 손실이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정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이를 차단하는 차원에서 배상 기준을 정부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자율배상도 “부적절” 응답이 과반
은행들이 자율배상에 나서야 한다고 정부가 지침을 내린 것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금융당국의 시장개입보다 은행의 자율배상이 시장 원리에 더 맞는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사법적 절차를 거치기 전에 사실상 정부 압박에 의한 자율배상은 투자자의 도덕적 해이만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많았다.

설문에 참여한 교수들의 52.2%(24명)는 ‘은행이 자율배상에 나서야 한다는 정부 지침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대학 교수는 “은행의 자율배상은 일관된 기준이 없어 부적절하다”고 했다.

반면 자율배상 지침이 적절하다고 보는 교수들은 불완전판매 행위의 책임이 은행에 있는 점, 사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기영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의 불완전판매 혐의가 확정된다면 직접적으로 연관된 투자 손실금을 배상할 책임이 응당 있다”고 했다.

금융당국은 이번 홍콩H지수 ELS 사태를 계기로 은행에서의 ELS 판매를 전면 중단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설문 응답자의 69.6%(32명)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이 잘못된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아예 판매 자체를 금지하는 정책은 시장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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