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아파트와 남은 아파트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입력 2024-02-21 17:01   수정 2024-02-21 18:10


지난 칼럼에서는 서대문 밖이 주택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아파트들이 들어선 동네라고 소개했다. 오늘의 주제도 아파트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나는 영등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여의도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막 개발된 여의도는 진짜 부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다 구비돼 맨몸으로 들어가 산다는 맨션아파트였다.

맨션아파트의 대척점에 시민아파트가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성문 밖에는 서울의 제 1호 시민아파트인 ‘금화시민아파트’가 있었다.


금화시민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곳 금화산 110미터 일대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삶의 터전을 일군 판자촌 밀집 지역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땅을 파고 거적으로 지붕을 올려 만든 토막집들이었다가 해방 후에는 나무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판자집들이 즐비했다. 서울시는 이들을 몰아내고 아파트를 지었다. 내부에 화장실과 연탄 창고를 들인 최신식이었다. 19평형과 14평형 두 종류로 2,000 세대가 넘는 대단지였다. 산에 나무가 별로 없던 때라 시내 어디에서도 잘 보였다. 시민아파트 1호 금화시민아파트는 처음에는 서울 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었을까? 김현옥 서울시장의 대답이다. “야 이놈들아 그것도 몰라!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그래서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청와대가 잘 보이는 곳에 지어졌다. 아마도 그린벨트, 군사보호구역, 국유지는 철거 및 토지 보상이 필요 없기 때문에 산등성이에 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민아파트에서 사고가 났다.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20분, 아파트 한 동 전체가 폭삭 내려앉아 32명이 죽고 38명이 다쳤다. 무너진 아파트는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에 지은 와우시민아파트,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했을 정도로 서울 시민에게 주목을 받았었다.

서울시 도시계획 국장을 지내고 서울시립대 교수였던 손정목 선생님의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2, 한울출판사>를 토대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재구성한다. 시민아파트 프로젝트는 별명이 '불도저'인 김현옥(1927~1997)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그의 부임 전에는 '큰 불도저'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과 '작은 불도저' 권오병 문교부장관이 있었지만 두 달 후에는 김현옥만이 불도저로 남았다. 김현옥은 서울시장이 되기 전에는 부산시장이었는데 그의 공보비서관이 ‘소풍’이라는 시를 쓴 천상병이다. 천하 부러울 것 없는 느긋한 성격의 천상병이 성격 급한 불도저 김현옥 밑에서 어떻게 비서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

김현옥은 늘 일에 미쳐 있었다. 1966년에는 도로, 육교, 지하도 건설에 미쳤고, 1967년에는 세운상가, 1968년에는 한강 개발과 여의도 기반공사인 윤중제 토목공사, 1969년에는 시민아파트 건설에 미쳤었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겨우 국민학교만 졸업했으나 군대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6.25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고 고속 승진해 준장으로 예편, 군복을 입은 채 최연소 나이로 제12대 부산시장이 되었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시장으로 발탁됐다. 준공식을 할 때마다 테이프 커팅에 사용한 가위를 시장실 벽면에 걸어놓고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시장직을 그만둘 때 한쪽 벽면이 모두 가위로 채워졌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추진했는지 알 수 있다.

6.25 전쟁 직후 서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960년대에는 240만 명을 넘어서더니 1970년대에는 540만 명을 넘겨 교통과 주택 문제가 대두됐다. 오죽하면 윤치영 서울시장은 "주거환경이 좋아지면 더 많은 농촌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올 것"이라면서 "아무런 방안을 강구하지 않는 것, 그 이상의 정책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나무 막대기를 주워 기둥과 보를 만들고 비닐과 기름종이, 천막과 함석으로 지붕을 얹고 생활했다. 이런 판자촌이 서울 곳곳에 넘쳐났다.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재원을 확보한 김현옥은 1973년까지 240억원을 들여 아파트 2천 동을 지어 10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놨다. 이른바 '시민아파트'라는 것이다. 시민들이 20만원만 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꿈같은 계획이었다. 20만원도 15년 장기 저리로 융자해준다는 계획이었으니 서민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었다. 그런데 말이 아파트지 골조공사만 하고 분양하는 이른바 ‘골조 아파트’, ‘프레임 아파트’였다. 이렇게 분양하면 내부 인테리어와 공용화장실, 계단 등은 입주민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어진 아파트가 온전할 리 없었다. 일단 경사 45도의 산비탈을 깎아 만든 것이 큰 문제였다. 철근을 넣은 콘크리트 기둥으로 건물을 떠받친다고 한들 그 무게를 지탱하기 쉽지 않았다. 규정상 7개의 철근을 넣어야 하는데 5개밖에 넣지 않았다. 산에 짓는 건물의 기둥은 암반까지 닿게 단단히 박아 지지하도록 하는 규정도 어겼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공사비 횡령이었다. 공사를 낙찰받은 대룡건설은 와우아파트 4개 동 120가구를 3,002만7,026원에 낙찰 받았다.

이 중에서 관에서 공급하는 시멘트 등 관급자재비를 떼먹었는데 그 돈이 932만7026원, 즉 2,070만원으로 공사를 한 것이다. 대룡건설은 500만원의 커미션을 떼고 무면허업자 박영배에게 하청을 주었다. 그 중에서 박영배는 20만원을 구청 건축과에 뇌물로 줬다. 최종 건축에 들어간 비용은 1,550만원, 평당 건축비는 11,742원으로 말도 안돼는 금액이었다. 시청에서 책정한 최저 공사비용은 평당 1만8,000원이었는데 사실 민간 건설업체에서 짓는 아파트 최저비용은 평당 4만원, 당시 인기 있는 맨션아파트는 10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관급비용에 포함된 시멘트 300포 중 30포를 빼내 전 마포경찰서장 소유 대중목욕탕 신축공사에 썼다. 구청 건축과 기사보는 매일 500원에서 1,000원씩을 현장에서 갈취했다.

와우아파트는 부실공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김현옥 서울시장은 쫓겨났다. 그 때까지 지어진 432개 동 1만7,300가구 중 안전기준에 불합격한 101개 동이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철거됐다. 공사비용 보다 많은 50억700만원이 철거비용으로 쓰였다. 다행히 이곳의 금화시민아파트는 별 문제 없이 사용되다 2015년에 철거됐다.

철거한 땅에는 개인주택과 공원, 산책로가 들어서 금화산의 일부가 되었다. 종로구 동숭동 시민아파트 자리에는 낙산 공원이, 신촌 시민아파트 자리에는 바람산 근린공원이 들어서 있다. 용산구 청파동 시민아파트 자리에는 효창근린공원이, 동작구 본동 시민아파트는 사육신묘지공원으로 바뀐 지 제법 되었다.

남은 시민아파트는 남산 자락에 지어진 회현 시민아파트 뿐이지만 이 곳도 철거 수순을 밟고 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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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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