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팔고, 남의 처 빼앗고…역사 속 '내기 바둑'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입력 2024-02-25 06:30   수정 2024-02-25 07:02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기간 455~475년)은 바둑을 좋아했던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과 ‘도미(都彌) 열전’에 각각 바둑과 얽힌 일화가 전한다.

그리 많지 않은 개로왕에 관한 정보 중 바둑에 관한 내용이 공통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의 ‘바둑 사랑’은 유독 남달랐던 듯하다.

하지만 그의 바둑 에피소드들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내용으로 그려진다. 왕과 평민의 ‘내기바둑’은 최고 권력자가 평민의 처를 빼앗는 수단이었다. 바둑에 빠져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던 그의 취미를 파고든 것은 적국 고구려의 스파이였다. 그렇게 바둑은 망국의 문을 여는 단초가 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9월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첩자로 승려 도림(道琳)을 점찍었다. 백제 개로왕(근개루(近蓋婁))이 ‘장기와 바둑’(博奕)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바둑은 적극 권력의 최상층부에 침투하는 무기가 됐다. 도림은 대궐 문에 이르러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라고 개로왕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했다(甚親?之, 恨相見之晩)”고 전해진다.

개로왕의 마음을 연 도림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유도해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도록’해 고구려의 침공 길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나랏일은 등한시하고, 잡기에 빠져 결국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그린 것이다.

‘도미열전’에 남은 바둑 에피소드도 도림에 관한 내용 못지않게 부정적이다. 여기서 바둑은 권력자의 무도한 ‘갑질’과 ‘악행’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도미열전’은 왕을 가장한 신하가 도미부인에게 부인에게 “도미와 내기 바둑을 둬 너를 얻었으니, 내일 너를 들여 궁인(宮人)으로 삼겠다. 지금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與都彌?得之, 來日入爾爲?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라고 겁박한다.

과연 도미는 개로왕과 정정당당한 한판을 뒀던 것일까.

참고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博奕)이라는 단어는 매우 낯선데, 박(博)은 장기나 바둑 등 대국하는 놀이를 말하고, 혁(奕)은 ‘위기(圍?)’로 바둑을 뜻한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 이전의 바둑은 가로·세로 17줄에 289점으로 가로·세로 19줄에 361점인 현대의 바둑과는 판이 다르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남은 바둑에 관한 기록은 고대 사회 최상층에서 바둑이 널리 유행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와 동시에 바둑에 대한 시선이 무척이나 부정적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단순한 취미 수준을 넘어서, 바둑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신진서 9단이 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막판 6연승, 농심배 16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현대 한국 사회가 써 내려가는 바둑 관련 역사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긍정적’ 내용 위주가 아닐까 싶어서 옛 기록을 뒤져봤다. 요즘에는 바둑을 두는 사람도,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도 찾기 힘들어진 것 같지만….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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