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 한 재계 맏형…'섬유의 반도체'로 세계 호령

입력 2024-03-29 20:40   수정 2024-03-30 02:25


“기업의 미래는 원천기술에 달렸다.”

29일 타계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은 ‘원천기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변변한 자원도 없던 시절 경제 대국인 미국, 일본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기술’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효성은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1971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1992년 스판덱스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고, 2000년 상용화에 성공한 건 이 같은 신념 덕분이다.

한국 섬유산업을 세계 일류로 올려놓은 ‘섬유업계의 거인’은 자신에겐 깐깐했지만, 밖으로는 기업과 기업인을 향한 애정으로 일관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 단체의 수장을 맡으며 산업계의 목소리를 대변해 ‘재계의 맏형’으로 불렸다.
○교수 꿈꿨던 공학도

조 명예회장은 1935년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과 하정옥 여사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를 입학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히비야고를 거쳐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졸업했다. 조 명예회장은 대학 교수를 꿈꾸는 공학도였다.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1966년 2월 부친으로부터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효성은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던 시기였다. 조홍제 회장은 화공학을 전공한 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부름에 아들은 회사로 달려가 효성그룹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조 명예회장은 섬유업계에서 ‘스판덱스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다. 당시 개발 일화가 유명하다. 효성의 연구원들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프로젝트명을 ‘Q(Question)’로 지었다. ‘돈만 낭비하는 사업’이라며 개발에 반대하는 내부 목소리도 많았지만 조 명예회장은 “안 되는 이유 100가지를 찾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가지 기회를 찾자”고 독려했고 3년 만에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이룬 쾌거였다.

조 명예회장은 누구보다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경영자였다. 효성이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에어백 원단, 폴리케톤(공업용 플라스틱) 등 세계 1위 제품을 4개나 보유할 수 있었던 것도 조 명예회장의 ‘기술 경영’ 덕분이다.
○R&D 중요성 강조한 경영자

조 명예회장에게 항상 따라붙은 꼬리표 중 하나는 ‘재계의 맏형’이란 수식어다. 조 명예회장이 지갑에 넣고 다닌 명함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일경제협회 회장, 전경련 회장,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등 20개에 달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필요성을 처음 공식 제기한 인물도 조 명예회장이다. 2000년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2년 한·미 FTA 체결을 성사시킨 주역 중 한 명으로 그가 꼽히는 이유다.

2007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맡으면서 때로는 정부와 각을 세우기도 했다. 전경련을 방문한 국회의원 앞에서 은행권이 기업에 대출해주는 대가로 적금 가입 등을 강제하던 ‘꺾기’ 관행에 대해 비판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 명예회장은 화려해 보이는 삶을 꺼렸다. 평소 수행비서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가 중국 출장에서 귀국하는 길에 마중 나온 임원들이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자 “내 가방은 내가 들 수 있고 당신들이 할 일은 이 가방에 전략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서를 좋아하며 학구적이고 동시에 합리적이기도 하다.

조 명예회장의 별명은 ‘조대리’였다. 매사를 꼼꼼히 챙기고 실무에 능하다고 해서다. 조 명예회장도 자신의 별명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또 직원들에겐 관대했지만 자신에겐 엄격했다. 정도에 입각한 투명경영을 강조했다. 감사업무를 새로 맡은 회계사에게 “나부터 감사하시오”라고 한 일화도 유명하다. 조 명예회장은 평소 “편법으로 만든 것들은 성공한다고 해도 한 번에 무너지기 쉽다”고 말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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