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의 제목은 ’한국 증시의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이다. 도입 목적이 증시 도약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은 국가 재흥 전략의 일환이다. 침체한 일본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마련됐다.
2012년 일본 경제는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수시장은 위축되고, 기업의 투자와 가계지출이 줄었다. 역대급 엔화 강세가 수출 기업에 부담을 줬다. 일본 제품의 해외 경쟁력을 약화시켰고, 수출 감소로 이어졌다. 2011년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여파가 계속됐다. 경제 재건과 복구 작업이 절실했다.
아베노믹스의 세 번째 화살
이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12년 말 취임하면서 경제부흥 정책인 아베노믹스를 발표했다. 무제한 양적완화를 통해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공공 재정을 확대하며 민간투자 촉진을 유도하는 성장전략, 이른바 3개의 화살로 일본을 재건하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향후 10년간 평균 명목 경제성장률 3%, 물가상승률 2%를 달성하기로 했다.
일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이 중 세 번째 화살인 성장전략에서 파생했다. 양적완화를 실시하고 정부지출을 늘려도 민간투자를 통해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하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세 번째 화살은 2014년 8월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이토 리포트’로 구체화된다. 경제산업성은 ‘지속 성장을 위한 경쟁력과 인센티브-기업과 투자자의 바람직한 관계 구축’을 주제로 한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 좌장을 맡은 이토 구니오 히토쓰바시대 특임 교수는 해당 연구 모임의 성과를 이토 리포트로 정리해 공개했다.
일본 기업지배구조 개혁 방안을 설계한 이토 교수는 리포트에서 일본을 기업의 중장기적 가치를 끌어내지 못하는 ‘자산운용 후진국’으로 진단했다. 기업과 투자자가 기업가치를 주제로 소통하지 않아 자본 효율성이 하락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업은 단기 실적에 치중하고, 투자자는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기업이 기업가치를 혁신할 수 있도록 금융, 인재, 사회·환경 자본의 투입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과 투자자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화하면 8%에 달하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이 기업가치 제고 수단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요소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원칙)와 기업지배구조 코드는 8%대 ROE를 달성하기 위한 두 바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자자가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라 기업경영에 참여하고 기업은 지배구조 코드에 따라 현대적 지배구조 체계를 구축해 이에 대응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금융청은 스튜어드십 코드(2014년 2월)를 공표했고, 일본 증권거래소도 2015년 6월 기업지배구조 코드를 발표했다.
일본 공적연금, ESG 투자 선도
이후 일본은 이토 리포트를 토대로 법무성, 경제산업성 등 정부 부처와 학계, 상장기업, 운용업계 등으로 구성된 민관 합동회의를 연속적으로 개최했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기업지배구조 코드를 기반으로 한 기업가치 제고 방안을 모색했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약 28회에 걸쳐 회의를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세계 최대 규모 연기금인 일본 공적연금(GPIF)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본 공적연금(GPIF)은 금융청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마련한 1년 뒤인 2015년에 이를 도입하고 모든 투자 의사결정에 ESG 요소를 고려하는 책임투자원칙(PRI)에도 서명했다. 모든 투자 요소를 ESG 측면에서 점검하기 위해서다. 2017년에는 ESG 측면에서 전체 포트폴리오를 분석하고 2019년부터는 액티브 운용자산뿐 아니라 주식투자의 80%를 차지하는 패시브 투자, 채권, 대체투자 영역에서 기업 관여 활동을 본격화했다.
GPIF가 움직이자 일본 기관투자자도 뒤따랐다. 2016년 3분기 기준 일본 기관투자자의 93%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코드 도입은 사문화되지 않고 ESG 투자로 번져나갔다. 글로벌 지속가능투자연합(GSIA)에 따르면 2020년 일본 기관투자자가 가장 선호하는 ESG 투자전략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기반으로 한 기업 참여와 주주행동이다.

단순, ESG 투자전략을 마련한 데 그치지 않고 시장 수익률을 초과하는 성과를 내면서 일본 내에서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ESG 투자는 주류화된다. 이와 관련해 배희은 기후변화에 관한 아시아투자그룹(AIGCC) 이사는 “당시 일본 주식시장이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해 GPIF는 시장 수익률을 상회는 초과수익을 끌어냈다. 본질적 장기투자 성과를 창출하는 시각을 지녔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GPIF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포트폴리오 위험 조정 전반에 기후변화를 반영한다. 2019년 ‘기후변화 결과 보고서’를 발간, 일본 주식시장과 기업 채권 자산군의 온실가스배출로 인한 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제한하는 효과를 검증하기도 했다. 기후 시나리오에 따라 전체 자산가치가 최대 5.67% 하락하거나 16.82% 상승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투자와 기후를 정교하게 통합해나가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 PBR 1배 요구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3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주가순자산비율(PBR) 1 이하인 프라임과 스탠더드 시장 상장사를 대상으로 자본수익성과 성장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 이행 목표를 수립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증시 도약이 아닌 기업의 장기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민관 그리고 유니버설 오너인 GPIF의 오랜 기간 연구와 협의의 결과물인 셈이다.
이와 함께 일본은 증시도 세분화했다. 지난해 7월 JPX 프라임150 지수를 출시해 지배구조가 우수하면서도 주가 상승 여력이 높은 기업을 지수에 담았다. 해당 지수는 시가총액 상위 500대 프라임 기업 중 PBR과 ROE 조건을 충족하는 150개 기업이 포함된다.
한편, 일본은 기업가치 혁신 재료를 찾기 위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이론적 근거가 된 이토 리포트를 2017년 2.0으로 개정한다. 제목은 지속 성장을 위한 장기투자(ESG·무형자산투자)연구회다. 이토 리포트 1.0이 기업과 투자자 간 대화의 중요성을 알렸다면 2.0은 어떤 언어로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다룬다.
이토 리포트 2.0은 제목 그대로 장기투자를 위해 기업이 무형자산과 ESG 경영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의 경쟁 공식이 급변하고 있어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ESG 경영 요소를 적극적으로 공시하고, 이를 토대로 기업과 투자자가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장기투자와 ESG 경영을 통합하기 위한 방안을 담는다. ESG 공시를 기반으로 투자자가 기업에 변화를 요구하면 기업이 경영전략 차원에서 ESG를 포함한 지속가능성 위험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업이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ESG 관련 핵심성과지표(KPI)를 만들어 투자자와 소통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이토 리포트 2.0은 기관투자자의 변화에도 주목했다. 패시브 운용이 급증해 기업 펀더멘털에 주목한 투자는 감소하고 기업과의 대화·경영 참여를 통해 장기적 리스크 요인인 ESG 등의 정보를 파악하고 의결권 행사 등을 통해 개선을 촉구하는 흐름이 강화될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2년 8월 이토 리포트 3.0을 공개했다. 제목은 ‘가치 협력과 창조(協創)를 위한 지침’이다. 이토 리포트 1.0과 2.0이 기업과 투자자의 대화 방법과 주제를 정했다면, 3.0에는 기업가치를 구체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방편을 담았다. ‘지속가능성을 향한 전환(Sustainability Transformation, SX)’을 이루기 위해서다.
기업의 경영 목표가 사회가 추구하는 지속가능성 목표와 일치되면 장기적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다. 이를 위해 기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지속가능성 이슈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경영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토 리포트 3.0은 경영전략을 수립하고 공시하는 도구인 셈이다.

인적자본과 녹색 전환 강조
특히 일본은 SX와 관련해 녹색 전환(Green Transformation, GX)과 인적자본에 주목하고 있다. 이토 교수를 좌장으로 한 인적자본 경영연구회는 2020년 ‘인재판 이토 리포트’에 이어 2022년 5월 ‘인재판 이토 리포트 2.0’을 발표했다. 기업가치의 결정 요인은 유형자산에서 무형자산으로 넘어갔고, 무형자산의 핵심은 인재라는 것이다.
기업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인재의 중요성을 수치화하고 인적자본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경제산업성 외에도 투자자와 증권거래소를 감독하는 금융청이 인적자본 제도를 다듬었다. 총리가 주도하는 ‘새 자본주의 그랜드디자인 실행계획위원회’는 인적자본을 중심으로 한 비재무정보 공시를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그해 8월 내각부는 ‘인적자본 가시화 지침’을 수립하고 대응 방향과 구체적 지표 등을 제시했다.
2022년 8월 경제산업성과 금융청의 후원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320개 이상 기업이 참여하는 인적자본 컨소시엄이 설립됐다. 이후 인적자본 공시를 의무화해 2023년 3월 이후 결산하는 4000여 개 일본 상장사가 인적자본 공시를 시작했다. 공시 권고 항목은 7개 분야 19개 지표로 인재 육성, 채용과 유지, 다양성, 건강과 안전, 노동 관행 등이 포함된다. 기업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인적자본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녹색 전환(GX)도 일본 경제산업성이 중요하게 다루는 SX 어젠다다. GX는 탄소중립 사회 및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바꾸다’가 아닌 ‘건너다’라는 뜻을 담아 트랜스포메이션을 ‘T’가 아닌 ‘X’로 표기한다. GX 경영은 탄소중립 달성을 넘어 선도적 투자와 자본 재배치를 통해 비즈니스 구조를 바꿈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일본은 기업이 GX 전략을 추진할 수 있도록 공격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한화 21조원에 달하는 그린 이노베이션 기금을 마련해 GX 전략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의 유사한 계정인 기후 대응 기금이 2조원대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격적인 지원이라고 볼 수 있다. 기술적으로 살펴보면 이토 리포트 3.0은 GX를 실현하기 위한 가이드이기도 하다.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경영 현황을 공시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서다.
日 밸류업 혁명, 이제부터가 시작
일본 경제부흥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된 일본 밸류업 혁명은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가치 혁신을 위한 무대가 마련됐고, 기회를 잡기 위해 일본 기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은 GX와 인적자본 경영뿐 아니라 자연자본 등 여타 ESG 경영 어젠다도 선점하는 모양새다.
지난 1월에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자연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NFD) 프레임워크에 따라 자연자본 정보 공시를 하기로 선언한 일본 기업은 80개사다. 전 세계 320개사가 선언에 참여했는데, 일본 기업이 가장 많았다. 한국 기업은 4곳에 불과하다. 관련 취재를 이어온 니케이ESG는 일본 기업이 자연 분야에서는 늦지 않겠다는 생각과 정보 공시가 장래 의무화되기 전에 자발적 공개를 통해 경험을 쌓고자 이번 선언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이 국가와 기업 차원에서 관리하는 GX, 자연자본, 인적자본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역시 차세대 공시 어젠다로 고려하고 있는 주제다.
정상진 한국투자신탁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한국과 일본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주주 가치 제고 운동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주주 가치 제고는 단기 모멘텀이 아니며, 세계적 흐름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열풍으로 해석해야 한다”면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주주 가치 제고는 한국의 국가경쟁력과도 연결되는 한국 증시의 장기 상승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승균 기자 cs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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