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처럼 널브러진 에르메스 바닥의 레몬들

입력 2024-04-01 18:39   수정 2024-04-02 00:40


잘 익은 노란색 레몬이 바닥에 잔뜩 흩뿌려져 있다. 흙이 묻고 군데군데 깨진 흔적이 남아 긴 세월을 버텼을 거라 짐작되는 여러 문양의 타일. 빗물이 빠지는 도로의 배수로까지 재현된 이곳은 유럽의 여느 도시가 아니다.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에르메스 전시장이다.

누군가의 발에 차일 것처럼 질서 없이 뒹구는 레몬은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흔하디 흔한 과일. 타일은 그리스, 로마, 이슬람과 게르만 문화가 녹아 있는 팔레르모의 도로를 촬영해 실제 사이즈로 출력한 사진이다. 레몬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유럽 남부의 상징이자 여기저기 발에 차이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민자를 의미한다.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하는 훼방꾼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간 전체에 신선한 에너지와 리듬을 부여하는 장치다.

이 작품들은 우리 시대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하나인 ‘클레어 퐁텐’이 창작했다. 클레어 퐁텐은 올해 60회를 맞이하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주제 ‘외국인은 어디에나’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예술가 집단. 이들이 2004년부터 해온 시리즈의 이름이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클레어 퐁텐의 아시아 첫 개인전으로,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출시할 작품을 포함해 총 10점이 나왔다. 클레어 퐁텐은 누구인가? 영국 미술가 제임스 손힐, 이탈리아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 부부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다가 2004년 설립한 그룹의 이름이다.

프랑스의 대중적 문구 브랜드이기도 한 클레어 퐁텐은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 놓고 ‘샘(Fountaine·1917)’이라고 이름 붙인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에 대한 직접적인 경의다. 뒤샹은 ‘예술가가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상적인 기성 용품을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게 하는’ 레디메이드 장르를 개척한 인물. 풀비아 카르네발레는 한국 기자들에게 “우린 클레어 퐁텐의 조수들”이라며 “마치 카프카 소설 속에 나오는 도우미들처럼, 어른의 얼굴을 한 영원한 학생처럼, 끊임없이 욕망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도용인가 차용인가. 20년째 이들은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게 주목하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시리즈는 이 문구를 여러 언어로 번역해 배치하는 방식. 지금까지 60여 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모든 버전이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장과 바티칸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 중 영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와 한국어 버전 네 점이 아뜰리에에르메스에 걸렸다.

거리 광고판에 주로 쓰이는 라이트박스는 명화를 자르고 확대한 뒤 고화질의 ‘깨진 화면’과 중첩해 선보였다. 마치 초대형 스마트폰의 깨진 액정 사이로 몰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저지르는 과도한 통제와 억압을 꼬집은 페미니즘 작품 ‘보호’, 불타오르는 지구를 형상화한 ‘오직 4도’는 이미지 자체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였던 조토 디본도네의 ‘애도’와 ‘새들에의 설교’는 원화 속 주인공을 배제하고 주변인을 끌어들이는 과감한 시도를 선보인다. 그동안 종교화에서 예수나 성인에게 시선을 줬던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통해 배경을 차지한 작은 천사의 표정, 하찮은 동물의 몸짓에 더 주목하게 된다.

이외에도 여행자의 기념품과 불법 소지품을 엮어 만든 ‘만능열쇠’, 기차역 분실물에서 찾은 어린아이의 겨울 점퍼를 걸어둔 ‘로스트 앤드 파운드’ 등이 함께 전시됐다.

전시의 제목인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현대인에게 ‘강요된 문화 코드’가 된 것에 맞서는 의미다. 안소연 아뜰리에에르메스 예술감독은 “레몬이 보기에는 좋은데 막상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고, 남부 이민자를 뜻하기도 한다”며 “클레어 퐁텐의 작품들은 익숙한 것의 차용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9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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