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거대한 행동주의 펀드가 된 국민연금

입력 2024-04-09 17:35   수정 2024-04-10 00:04

OCI그룹과의 통합 추진 과정에서 촉발된 한미약품그룹 모녀와 형제간 팽팽했던 경영권 분쟁.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의 찬반 의견마저 엇갈리면서 이 회사 지분 7.66%를 보유한 국민연금의 결정에 초미의 관심이 쏠렸다. 지난달 27일 열린 주주총회에 앞서 국민연금이 회장 모녀 측을 지지하면서 승부가 기우는 듯했지만 소액주주들이 대거 형제 손을 들어 판세가 뒤집혔다. 이번 한미약품 주총에선 무력화됐지만,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캐스팅보트를 휘두르는 사례가 크게 느는 추세다. 올해 주총만 해도 행동주의 펀드가 신임 사장 선임에 반대해 치열한 표 경쟁이 벌어진 KT&G, 동업자 가문 간 갈등이 표 대결로 이어진 고려아연 등 전선이 형성된 곳곳에서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국민연금은 1000조원이 넘는 국민 노후자금을 굴린다. 이 중 국내 주식시장에 148조원을 투입해 281곳 상장사 지분 5%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연금이 시장은 물론 기업 경영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는 모습은 우려스럽다. 경영권 분쟁이 늘고, 행동주의 펀드 공격이 잦아지는 가운데 국민연금이 적극성을 넘어 공격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서면서 ‘거대한 행동주의 펀드’가 돼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문제는 이런 무소불위 권력에 비해 독립성과 중립성이 확보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까다롭고 민감한 이슈가 발생하면 그 판단을 산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에 넘긴다. 수탁위는 총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상근 전문위원 3명과 외부 전문가 3명은 각각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지역가입자 단체에서 1명씩 추천한 인물이고 나머지 3명은 전문가 단체가 추천한 인사다. 추천 단체나 정치적 입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막대한 권한에 비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지난해 수탁위원으로 임명된 한 교수는 임기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총선의 비례정당 공천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연금에서 수탁자책임 활동 관련 업무를 수행하던 핵심 인력이 줄줄이 로펌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논란거리다. 국민연금의 기업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전관의 몸값이 치솟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런 상황에 정부는 최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반영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행동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전임 정부가 연금을 기업 경영 개입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지 7년 만의 첫 수정이다. 투자 기업의 밸류업 참여나 이행 여부 등을 요구하는 등 간섭을 키운다는 게 골자다. 밸류업의 정책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연금을 정책에 감초처럼 활용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자칫 밸류업 분위기에 편승해 단기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린 뒤 시세 차익만 챙기고 떠나는 행동주의 펀드에 들러리 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연금 기금 조성과 운용 목적은 국민의 노후 보장이다. 그런데 염불(기금 수익률)보다 잿밥(의결권 행사)에 과도한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게 현실이다. 각계를 대변하는 소수 위원이 밀실에 둘러앉아 기업 운명을 좌우하기에 앞서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는 게 선결 과제일 것이다.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재무적 투자자에 머무르는 게 마땅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총의 찬성과 반대 비율에 따라 의결권을 분리 행사하는 ‘섀도 보팅’을 일반화하는 게 맞다. 나아가 연금의 주식시장 투자금을 잘게 쪼개 자격 있는 민간 운용사들에 전부 넘기고 의결권 행사에는 손을 떼는 게 근본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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