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제끼고 이간질까지…소름 돋는 '사내 정치꾼'의 최후 [곽용희의 인사노무노트]

입력 2024-04-21 08:57   수정 2024-04-22 07:38


조직에서는 구성원 간 갈등이나 '사내 정치'가 불거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특히 임원 간, 조직 간 '파워 게임'이 벌어지면 회사 분위기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다. 심각한 경우 일부 구성원들의 퇴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대표이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헛소문을 내거나 사내 구성원 간 이간질에 나서는 등 지나친 사내정치를 일삼은 임원을 해고한 것은 적법하다는 법원 판결이 화제다.
○"본사만 나를 자를 수 있어"…HR임원의 도발
독일계 기업의 한국법인 D사는 근로자 300명 규모의 제조업체다. 이 회사는 2019년 2월 회사 임원인 E 전무의 매출실적 허위 보고와 이와 관련된 '외부 창고'의 존재를 알게 됐다. 한국법인 대표는 결국 같은해 4월 재무팀에 외부 창고 실사를 지시하고 인사팀에 조직 개편안 마련을 지시했다.

하지만 2016년 이 회사에 합류한 인사 조직 상무 A는 허위 보고가 적발된 E 전무와 친밀한 데다 평소 대표와 각을 세워온 인물이다. 개편안이 나온 날 곧바로 대표에게 ‘독일 본사와 조율해야 해서 개편안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에 대표는 "본사와 조율은 내 일이며 이 건은 조율 대상도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A는 보란듯 대표를 수신인으로 하고 다른 임원들을 참조로한 이메일 답장에서 ‘HR(인사팀)은 더 이상 사장님의 대서소 역할을 할 수 없다. 조직 개편에 절대 동의 못한다'라고 저격했다.

이후 독일 본사 인사담당자로부터 "부서 내 해고·구조조정 등은 사전에 한국 대표와 독일 본사 담당자가 합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은 A는 당당하게 휘하 인사팀 직원들에게 ‘대표는 나를 어찌 할 수 없다. (독일) 그룹에서만 나를 자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대표가 본사와 논의를 마친 후 A에게 "E 전무 해임 절차를 밟으라"고 지시했지만, A는 또다시 독일 본사와 조율을 이유로 거부했다. A는 본사에서 "E 전무를 내보내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을 확인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공개 부문장 회의에서 "그룹 지침은 (E 전무와) 퇴사를 위한 대화를 진행하라는 의미로, 해임하라는 대표 지시에 동의할 수 없다"며 지시를 전면·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참다못한 대표이사는 A 휘하 인사팀장에게 E 전무 해임 절차와 관련해 서울 출장을 지시했다. 이를 알게 된 A는 인사팀장에게 출장 거부를 지시했지만 대표가 팀장에 재차 강력하게 지시하면서 인사팀장은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

이에 인사팀장을 강하게 질책한 A는 한달 후 인사팀장을 뺀 인사팀원들을 불러 "앞으로 팀장에 보고하지 말라. 대표가 지시해도 내 지시를 따르라, 대표도 나를 어쩔 수 없다"고 재차 발언했다. 이후 인사팀장겐 “팀장 권한을 정지한다. 당분간은 사장님 지시에 전념하라"는 사실상 업무 배제 메일을 보냈다.

A는 조직 장악 의도는 점점 대범해졌다. 다른 임원들에게 ‘대표가 올해 10월 말까지만 근무하고 사임한다'. '그룹(독일 본사)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는 등 헛소문을 퍼뜨렸다.

심지어 자신이 버린 인사팀장과 대표 사이 이간질에도 나섰다. 인사팀장에게는 대표이사의 과거 발언 녹음 파일을 들려주며 ‘(대표가) 너를 정리하라는 걸 내가 막았다’고 말하는 반면 대표에게는 "인사팀장이 저 살 궁리만 하며 물증을 모으고 있다. 믿지 말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A상무의 도넘은 사내 정치질은 결국 독일 본사에까지 전해졌고 독일 본사는 2019년 8월 A에게 ‘내부 분열을 조장해 신뢰관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해임 사유로는 △조직 내분 및 불신 조장 △팀장 인사에 대한 월권 △대표이사 관련 유언비어 유포 △공개적 항명 및 대표 인사권 부정 등이 제시됐다. 해고된 A가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지만 중노위에서도 기각되자 중노위를 상대로 '부당해고구제재심판정취소'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경영·위계 질서 저해 심각...해고 적법"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등법원은 해고가 적법하다며 1심에 이어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곧이어 지난해 12월 대법원도 해당 사건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법원은 징계 사유 대부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징계 사실관계의 주요 부분은 A도 인정하거나 이메일 등 객관적 증거로 인정된다"라고 판단했다.

이를 바탕으로 재판부는 "A는 HR 임원으로서 사내 질서에 끼치는 영향이 크고 일반 근로자보다 더 높은 직업윤리 의식을 갖춰야 한다"라며 "합리적인 이유 없이 대표 지시에 공개 석상에서 수차례 불응하고, 임의로 인사팀장을 직무 배제하는 등 사내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라고 꼬집었다.

A는 재판서 독일 본사와의 의견 조율 때문에 대표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개 항명 이후 A가 E전무에 "개판 한번 만들어 봅시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견 조율이 아니라 '사내 질서 문란 행위'라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재판부는 "(A의 행동은) 본사로부터 지휘·감독을 받는 업무라기보다 E 전무 징계 절차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며 "조직 내 분란을 조장하고 대표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해 회사의 경영질서와 위계질서가 크게 훼손됐다"며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사내정치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데다 주변 조직 구성원에 대한 '가스라이팅'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아 적발이 쉽지 않다. 따라서 도넘은 사내정치질에 대해 징계를 내리기 위해서는 증거수집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분란 조장' '명령 불복종' 의도를 명백하게 입증할 자료가 없다면 어설픈 징계 조치는 되레 역풍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용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특히 외국계 기업의 경우 의사 결정 과정에 글로벌 본사가 개입될 우려가 있고 언어적 장벽도 있어 사내정치가 횡행할 수 있다"며 "IT기업도 수평적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이런 상명 하복 체계나 지휘명령 체계가 명확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당 사안에서 A가 이메일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항명이나 명령 미이행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것이 주효했다"며 "기업마다 '질서 문란 행위'라는 다소 포괄적인 징계 사유를 두고 있지만 이에 해당하는지는 철저히 자료와 증거에 의해 규율할 수 밖에 없다"라고 조언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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