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떠난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입력 2024-05-22 17:02   수정 2024-05-23 10:21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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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단의 거목’ 신경림 선생께서 오늘(22일)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88세. 깊이 있는 성찰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으로 문인과 독자 모두에게 사랑받은 시인답게 장례도 대한민국 문인장(文人葬)으로 치러집니다.

선생은 저에게도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구수한 옛날이야기와 시작(詩作) 뒷얘기를 즐겁게 들려주셨고, “시는 혼자 골방에 들어앉아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생생한 삶터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며 “힘닿는 데까지 일터를 지키면서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말씀하셨지요.

2005년에는 제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문예중앙)의 표4(표지 뒷면)에 감동적인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그때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추천사를 다시 읽어보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해맑고 아름답고, 곧고 깊은 그의 시는 ‘속 다 비치는 맨몸’(「남해 멸치」)의 남해 멸치처럼 해맑고,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별에게 묻다」)처럼 아름답다. 이 해맑음과 아름다움은 마땅히 그의 시에 대중성을 갖게 해줄 터요, 시가 독자와 괴리되고 있는 점이 우리 시의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것만도 큰 미덕일 터이다. 그러나 이 해맑음과 아름다움이 ‘신의 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을 수’(「폭포」) 있기를 바라는 진실에 대한 간절한 바람과 ‘내 묻힌 치욕의 강토 (……) 칼집으로 삼겠도다’(「칼을 베고 눕다」)라는 역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의 시는 또한 곧고 깊다. 그의 시를 읽고 많은 독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 시 참 진국이라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시라고, 왜 이제야 그의 시들을 읽게 되었느냐고.(「진미 생태찌개」)” ―신경림 (시인)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선생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를 다시 음미하기로 하고, 3년 전 ‘아침 시편’에 배달했던 편지를 다시 실어 보냅니다.

▶▶▶[관련 뉴스] '가난한 사랑의 노래' 문학계 거목 신경림 시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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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 노래」는 언제 읽어도 콧등이 찡해지는 시입니다. 언젠가 신경림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길음동 산동네에 살 때였다고 합니다. 집 근처에 자주 들르던 술집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 집 딸과 연인 사이인 한 청년을 만났다는군요.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열정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처지를 못내 부끄러워하는 순박한 젊은이였죠.

청년이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그 집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결혼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딸 가진 부모로서는 그런 사위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청년은 그 집 딸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여러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시인은 청년에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둘이 결혼하면 주례도 해 주고 결혼 축시도 써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서 둘은 머잖아 결혼식을 올리게 됐지요.

결혼식장에서 시인은 그들을 위해 「너희 사랑」이라는 축시를 읽어주었습니다.

너희 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 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결혼식은 어느 건물의 비좁고 허름한 지하실을 빌려서 했습니다. 청년이 노동운동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요.

숨어서 치른 결혼식은 자못 감동스러웠습니다. 축하객은 다 합쳐봐야 열 명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얼마나 가슴 저린 사랑의 결실인지 알고 있었기에 저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보냈습니다.

그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온 시인은 두 사람이 겪은 마음고생과 인생의 쓰라림을 달래는 마음으로 시 한 편을 더 썼습니다. 그때 탄생한 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첫 구절만 읽어도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입니다. 방범대원의 호각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고 밤마다 잠도 이루지 못하면서 낮에는 또 육중한 현실의 기계음에 시달리는 청년의 마음에 어찌 두려움과 그리움이 없었겠습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절절하다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랑의 아픔 속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가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말입니다.

결핍이 오히려 이들의 사랑을 완성한 힘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얘기처럼 가난이란 인생의 커다란 멍에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외면하거나 꿈을 접을 수는 없지 않은가요.

‘가난하기에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음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신경림 시인은 스물한 살 때 「갈대」라는 시로 등단한 이후, 자청해서 남을 위한 헌사를 붙인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이 두 편의 시는 그가 ‘이웃의 한 젊은이’와 ‘누이’에게 주는 각별한 애정의 증표이지요.
그렇습니다. 때로는 결핍이 충족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꿈을 꾸고, 뜨겁게 사랑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게 곧 우리 인생이니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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