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등 반도체(DS)부문 경영진이 지난해 9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이후 국내 반도체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엔비디아 고위 임원이 삼성전자 경영진 앞에서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고객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삼성전자의 HBM 제품 기술력'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는 것이다.
최근 황 CEO가 '공개된 자리'에서 말한 삼성전자에 대한 응원과 격려와는 180도 다른 분위기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의 HBM3E 12단 제품에 남긴 '젠슨 승인(JENSEN APPROVED)' 서명부터 "삼성전자 HBM 성공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2025년 1월 CES 2025)는 발언까지.
삼성전자 임직원과 투자자는 지난 1년간 황 CEO의 말에 '희망 고문'을 당했다. 이런 영향인지 삼성전자 최고 경영진과 이사회에도 '2024년 2분기 엔비디아 퀄 통과 가능성', '3분기 중엔 통과 유력' 등의 보고가 올라갔지만, 정작 현장에선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삼성전자는 지금도 HBM3E 12단 재설계와 퀄 테스트를 준비 중이다.
황 CEO의 행보는 엔비디아와 삼성전자가 비즈니스 세계의 갑을 관계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반적이진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삼성전자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젠슨 황이 의도된 행보가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만계 미국인인 황 CEO의 '친(親) 대만' 행보에 대해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업계에선 젠슨 황의 '한국 패싱'이 과거 삼성전자 등으로부터 받은 서운함 때문이란 얘기도 나온다.
이는 공식 행사장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분석이 있다. 지난 6일 CES 2025 발표에서 자사 그래픽카드 최신 제품에 삼성전자의 최신 그래픽 D램(GDDR7)을 납품 받았으면서도, 미국 마이크론 제품을 썼다고 한 것, 하루 뒤 기자간담회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GDDR7을 안 만드는 것으로 안다고 말한 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젠슨 황은 이 발언을 9일 정정했다.)
우려스러운 점은 젠슨 황과 엔비디아의 대만 키워주기 때문에 대만 기업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은 이미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TSMC가 구축한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생태계를 발판으로 '글로벌 AI 반도체 중심 국가'로 떠올랐다. 2022년 기준 대만 국민소득이 한국을 역전하기도 했다. (2023년 한국 재역전, 2024년 한국 우위 전망)
이런 상황에서 대만이 TSMC에 이어 엔비디아의 지원까지 받게 되면서 대만 기업들은 AI 반도체를 넘어 'AI 하드웨어' 전반의 핵심 공급망에 들어가고 있다. 미국 애플의 하청업체에서 엔비디아의 AI 서버 부품 파트너로 변신 중인 폭스콘이 대표적이다. 대만의 TV, 스마트폰용 칩 전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미디어텍은 엔비디아와 손잡고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엔비디아가 올 초 CES 2025에서 공개한 '내 책상 위의 AI PC'인 디지트의 핵심 칩도 미디어텍과 공동 개발했다. 이밖에 AI 시대 핵심 장비로 부각되고 있는 AI 데이터센터용 액침 냉각 장치 등의 분야에서도 대만 기업이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대만의 부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에 아쉬운 점이 많아지고 있다"며 "메모리반도체에 파운드리 등 시스템반도체를 더해 'AI 하드웨어 중심 국가'가 되려고 했던 한국의 전략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주목할 점은 대만에서 AI 산업 생태계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이 독보적인 AI 기술 경쟁력을 갖춰 고객사를 유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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