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장지수펀드(ETF) 운용사가 ‘보수 전쟁’에 나선 건 수익을 줄여서라도 시장점유율을 늘리겠다는 의도다. 운용사 간 치열한 경쟁으로 보수가 낮아지면 그만큼 장기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투자자에게는 이익이다. 하지만 자산운용사들이 상품 혁신 경쟁 대신 손쉬운 보수 인하 경쟁에만 매몰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운용사 ‘제살깎아먹기 경쟁’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자산운용은 ‘KODEX 미국S&P500’과 ‘KODEX 미국나스닥100’의 운용보수를 기존 연 0.0009%에서 연 0.0001%로 낮췄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전날 동일한 상품의 운용보수를 연 0.03%에서 연 0.0002%로 인하했다. 운용보수는 ETF에 부과되는 총보수 가운데 자산운용사가 가져가는 몫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미국S&P500 ETF의 순자산이 10조원까지 불어난다고 해도 1년에 운용사가 가져갈 수 있는 금액이 삼성운용은 1000만원, 미래에셋은 2000만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두 운용사의 보수 인하 경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삼성운용은 지난해 4월 미국 대표지수 4종 ETF의 총보수를 기존 연 0.05%에서 0.0099%로 인하했다. 이에 미래에셋도 금리형 상품인 ‘TIGER CD1년금리액티브(합성)’ 등의 수수료를 연 0.05%에서 0.0098%로 내리며 맞불을 놨다.
업계 1·2위를 다투는 대형 자산운용사가 ETF 보수 인하 경쟁에 나선 건 시장점유율에서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해서다. 삼성운용과 미래에셋은 최근 업계 1위 자리를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여 왔다. 5년 전만 해도 삼성운용의 ETF 점유율이 50%를 웃돌며 공고한 업계 1위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해외 투자 수요가 늘고, 미래에셋이 해외 상품을 중심으로 몸집을 불리며 삼성운용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이날 기준 삼성운용의 ETF 점유율은 38.1%, 미래에셋은 35.6%다. 두 회사 시장점유율 격차는 2.5%포인트까지 좁혀졌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두 대형사가 하루 차이로 동일한 상품에 대해 보수를 인하하며 최저보수 경쟁을 벌이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며 “돈을 벌지 않아도 좋으니 시장점유율을 절대 내어줄 수 없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수수료보다 품질 경쟁 필요”
ETF 운용사들이 저보수를 표방하며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건 한국만의 얘기는 아니다. ETF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S&P500지수처럼 운용을 차별화하기 어려운 상품은 서로 운용보수를 인하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ETF 담당 임원은 “미국은 ETF에서 운용보수를 받지 않는 ‘제로(0) 보수’도 있다”며 “한국은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의 창구 지도로 제로 보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수점 단위의 최저 보수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보수 인하로 촉발된 운용사 간 ETF 경쟁이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 ETF 시장이 2022년 말 78조원에서 최근 185조원 규모로 급성장하며 운용사들의 순위 다툼도 과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ETF 시장점유율 3·4위인 KB자산운용과 한국투자신탁운용 역시 ‘뒤집기’와 ‘버티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임원은 “운용사 간 핵심 인력을 서로 데려가려는 움직임도 치열하다”며 “투자자를 위한 상품 개발 대신 시장점유율 경쟁만 남은 건 아닌지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나수지/최만수 기자 suj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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