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바·콜라로 하루 버텨"…영화 '택시 드라이버'가 현실로? [김익환의 필름노믹스]

입력 2025-02-09 11:39   수정 2025-02-09 15:33



1976년 미국 뉴욕. 베트남 전쟁 퇴역 군인인 트래비스는 택시 운전기사다. 하루 종일 코카콜라와 초코바, 나초칩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는 외설영화관을 전전한다. 그가 택시로 누비는 뉴욕시는 디스토피아의 전형이다. 하수구에선 물이 새고, 정전으로 도시 전체는 어둡다. 도시 곳곳은 범죄자와 성매매 여성들로 가득 찼다.

미국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대표작 '택시 드라이버'는 1970년대 어두운 미국의 일상을 담고 있다. 미국 경제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택시 드라이버와 '대부' 등의 1970년대 영화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의 팍팍하고 어두운 시대상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경제 전망을 둘러싸고 스태그플레이션이냐, 슬로플레이션(slowflation·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이냐는 논쟁이 점화됐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뒷걸음질치지 않고 1%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가 상승 흐름이 임금을 밀어 올리는 '인플레이션 소용돌이' 흐름이 포착되지 않은 만큼 스태그플레이션 지적은 섣부르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떨어지는 성장 전망…2%대 물가 상승
9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달 나란히 올해 경제전망 수정치를 발표한다. 한은은 오는 25일 발표한 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성장률을 종전 1.9%에서 1.5% 안팎으로 수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KDI도 오는 11일 수정 경제전망 발표를 통해 올해 성장률을 종전 2.0%에서 큰 폭 내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1.1~1.4%까지 하향 조정했다.

한국의 성장률 전망을 줄줄이 끌어내린 것은 한국 경제의 두 날개인 소비와 수출이 동시에 꺾일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계엄과 탄핵 사태로 소비심리가 큰 폭 위축된 데다 트럼프 정부의 보편관세 정책에 따라 수출이 움츠러들 것이라는 분석이 반영됐다. 소비 절벽 흐름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재화 소비를 보여주는 지표인 소매판매액지수는 작년 12월 전월 대비 0.6% 줄었다. 지난해 9월 -0.3%, 10월 -0.7%, 11월 0%를 기록하는 등 넉 달째 부진을 이어갔다.

이처럼 씀씀이가 줄어들면 물가 상승 압력은 줄어든다. 하지만 물가는 갈수록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를 기록했다. 지난달까지 석 달 연속 상승하며 작년 8월(2.0%) 후 2%대에 다시 진입했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달러로 수입하는 휘발유 경유 등 석유류 가격이 7.3% 치솟으면서 물가를 자극한 결과다. 성장 흐름이 둔화한 데다 공급 요인으로 물가가 치솟으면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불거졌다.
혹독한 스태그플레이션…美, 기준금리 20%로 잡아
1970년대 전세계 경제학계와 경제부처들은 충격을 받았다. ‘물가가 오르면 실업률이 떨어지고, 물가가 내리면 실업률은 올라간다’는 이른바 ‘필립스 곡선’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당시 경제이론과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는 필립스 곡선이 1970년대 '오일 쇼크'와 함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정부가 실업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면 어느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 실업률을 낮출 수가 있다. 반대로 물가안정을 목표로 한다면 어느 정도의 실업률 상승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 상황에서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1973∼1974년 제4차 중동 전쟁으로 기름값이 고공 행진한 결과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정점에 달한 1974년과 1975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0.5%, -0.2%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1%, 9.2%로 고공 행진했다.

이 같은 스태그플레이션이 벌어진 것은 ‘공급 충격→물가 상승→고용 감소·제품 가격 인상→물가 상승’ 악순환 고리가 생겨난 데 따른 것이다. 고유가로 물가가 뜀박질하면서 살림이 팍팍해진 기업은 고용을 줄이는 한편 제품가격은 올린다.

반면 고유가로 물가가 치솟으면서 실질임금이 줄어든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빈번해졌다. 당시 인건비 상승에 직면한 기업은 고용을 줄이면서 가계 소득·씀씀이도 덩달아 감소했다. 전례 없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기준금리를 대폭 높이는 형태로 대응했다. 1970년 12월 연 3%였던 미국 기준금리는 1980년 3월에 19.85%까지 치솟았다.

스태그플레이션 진단 섣불러…韓 슬로플레이션 적합

한국 경제의 올해 경제 상황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흐름과는 판이하다. 올해 성장률은 1%대를 유지하는 등 상승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물가는 한은 목표치(2.0%)에서 여전히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경기가 끌어내릴 변수가 많고 불확실성이 많지만 여전히 1%대 성장률, 2%대 물가 전망이 지배적이다. 마이너스 성장률과 두 자릿수 안팎의 물가 상승률을 나타내는 스태그플레이션과는 거리가 멀다. 반백 년 전에 혹독했던 시대와 비교하면 현재는 상당히 평온하다는 것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 초입이라는 진단은 과도하다"며 "국제유가가 불안한 상황이지만 팍팍 오름세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정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도 "물가가 올해 정부 전망치인 1.8% 수준에 수렴할 수 있다"며 "스태그플레이션은 물론 슬로플레이션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전제조건인 임금 인플레이션 양상도 보이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월평균 임금근로자의 전년 동월 대비 임금 상승률은 9월 -0.3%, 10월 3.4% 11월 2.3%로 들쭉날쭉한 흐름이지만 2%대 내외 수준이다. 한국 경제는 성장 속도가 더뎌지고 물가가 오름세를 보이는 슬로플레이션의 초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2.2%에 불과하지만 체감물가는 더 높다"며 "물가 지표에 자가주거비(자기 집에 임대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비용) 등이 빠져있고 농산물의 가중치가 너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태그플레이션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용어풀이)스태그플레이션, 슬로플레이션

고물가(inflation)가 이어지는 가운데 성장 속도가 더뎌진(slow) 상황을 뜻한다. 고물가 속에 경기가 침체에 빠지는 스태그플레이션과 비교해 경기 하강 강도가 약하지만 경제 전반에 상당한 충격을 준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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