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그래도 국내 수요 감소로 신음하던 한국 철강업체는 값싼 외국산마저 들어오자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작년 12월 정부에 반덤핑 조사를 해달라고 읍소했다. 국내 철강 생태계 붕괴를 우려한 정부는 통상 마찰 가능성에도 중국과 일본 대기업을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라는 칼을 빼들기로 했다.
일본 기업이 저가 공세를 펼칠 수 있는 배경에는 ‘엔저(低)’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 기업은 내수 침체에 따른 공급 과잉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으로 한국을 택했다. 운송비가 많이 드는 철강재 특성상 운송거리가 짧은 한국이 최적의 밀어내기 장소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소비한 열연강판 약 611만t 가운데 외국산이 차지한 비중은 60.9%(약 372만t)에 달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2조6500억~3조원에 달하는 해외 열연강판이 국내에 풀린 셈이다. 외국산 열연강판의 52.2%는 일본산, 44.1%는 중국산이었다.
현대제철은 일본·중국산 열연강판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고 정부에 여러 차례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연강판은 냉연강판을 비롯해 도금강판, 컬러강판, 강관 등 대다수 판재류에 쓰이는 기초 철강재다. “열연강판 시장이 무너지면 한국 철강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철강업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철강 제품은 한국과 일본이 해외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합하는 품목이다. 특히 열연강판 같은 기초 판재류는 특수강에 쓰이는 경우를 제외하곤 기술 격차가 거의 없어 가격이 판매를 좌우한다.
하지만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관세 부과의 효과는 업체별로 다르다. 동국제강, 세아제강, KG스틸 등 제강사는 값싼 외국산 열연강판을 활용해 컬러강판, 강관 등을 만들기 때문이다. 반덤핑 관세가 붙으면 재료비 부담이 높아지는 구조다.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철강업계는 최상의 시나리오로 반덤핑 조사 과정에서 일본 및 중국 철강업체와 합의에 이르는 것을 꼽는다. 일본과 중국 기업이 ‘일정 가격 이상, 정해진 물량 이외엔 수출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반덤핑 조사를 끝낸다는 얘기다.
▶ 열연강판
쇳물로 만든 평평한 판재인 반제품(슬라브)을 높은 온도로 가열해 3㎜ 두께로 가공한 강판. 냉연강판을 비롯해 도금강판, 컬러강판, 강관 등 대다수 판재류의 기초 철강재로 쓰인다.
김형규/하지은/김대훈 기자 k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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