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양자역학 등 개개인의 지성으론 따라잡기 힘들 만큼 기술의 발전이 빨라진 시기에 예술가들은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 할까. 경기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은 바로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전시다. ‘랜덤 액세스’는 1963년 백남준이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의 이름. 백남준은 이 작품을 소개한 당시 전시 포스터에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가 던진 질문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적었다. 이번 전시는 앎에 대해 반문하고, 끊임없이 이해를 넓히려 했던 백남준처럼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을 보여준다.
전시에는 고요손, 김호남, 사룻 수파수티벡(태국), 얀투(일본), 장한나, 정혜선·육성민, 한우리 등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7팀(8명)의 젊은 예술가가 만든 작품 14점이 나왔다. 비디오와 조각, 설치 등으로 구성됐다. 백남준아트센터 측은 “우리가 규정해 놓은 사고방식과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존을 모색하거나 예술의 형식과 의미를 확장하는 실험도 있다”고 설명했다.
장한나의 ‘신 생태계’는 사고를 지배하는 인식을 비튼다는 면에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결이 비슷하다. 작가는 2017년부터 동해안에서 직접 수집한 ‘암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흥미로운 건 ‘뉴 락’(새로운 암석)이라 직접 이름 붙인 이 암석이 사실은 자연 속에서 돌처럼 변한 플라스틱이라는 것. 인간이 만든 인공물질인 플라스틱은 버려지는 순간 자연과 섞일 수 없는 쓰레기가 된다는 기존의 인식과 달리, 작품은 뉴 락이 바닷가 동식물의 서식지로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대척점에 있는 자연과 인공 플라스틱이 하나가 되는 모습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일본 작가 얀투가 선보인 ‘진행 중인 설치’도 눈길을 끈다. 전시장 한복판에 세워진 철제 캐비닛엔 청소기, 쿠팡 로켓배송 박스, 석고상, 백남준이 1984년 선보인 오브제 작품 ‘컬러 의자, 흑백 의자’가 함께 올려져 있다. 주위에선 물류센터에서 볼 법한 자동운반차량(AGV)이 물건을 옮긴다. 이 일련의 광경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란 의문을 던진다. AGV 로봇이 ‘예술품’과 ‘예술품이 아닌 것’을 나누는 인간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대상을 동등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설치나 미디어 작품이 그렇듯 전시에 나온 작품들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완벽하거나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담긴 것은 아니다. 다소 조악하고 어설픈 점도 더러 있다. 작가들이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아니기 때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적 사유에서 비롯된 현대 문명의 이면과 잠재된 가치를 유추해보는 게 전시의 포인트다. 백남준아트센터 관계자는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촉발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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