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L사 2년 만기 회사채 500억원어치가 발행금리보다 0.021%포인트 높은 금리에 매각됐다. 금리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900억원어치가 매각된 18일에는 0.044%포인트, 2400억원어치가 팔린 19일에는 0.060%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이달 14일 이 회사는 1조6000억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한 직후 2년 만기 6400억원어치 가운데 3800억원어치가 사흘간 쏟아진 것이다. 증권사들이 회사채 발행 주관을 대가로 인수한 L사 회사채를 곧바로 손절한 것으로 파악된다. 금리가 가장 크게 벌어진 19일에만 증권사들은 1억4400만원의 손해를 떠안은 것으로 추산된다.
증권사 출혈 경쟁 속에 회사채 수요예측 시장 왜곡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회사채 주관 딜을 따낼 때 보험사, 자산운용사, 캐피털사 등 계열사 참여를 약속하며 수임하는 캡티브 영업 관행이 선을 넘은 지 오래라는 지적이 나온다. 발행사 요구 금리를 맞춰 주관 증권사가 자기자금으로 회사채를 인수했다가 곧바로 처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증권사가 회사채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빨리 처분하기 위해 발행 전에 선매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 대형 증권사 채권 담당자는 “회사채가 발행되기 며칠 전에 금리 수준을 파악한 뒤 발행 직후 넘길 수 있도록 거래 상대방을 미리 구해놓는 일이 많다”며 “작년부터 조짐이 있었지만 올해 들어 회사채 주관 경쟁이 너무 심해지면서 금리 왜곡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채 시장에서 ‘제 살 깎아먹기’ 영업은 대형사, 중소형사 구분 없이 벌어지고 있다. 회사채 주관을 잡지 못하면 수수료가 높은 기업금융(IB) 딜을 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발행 기업들은 이런 증권사 경쟁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 수요예측이 무색하게 요구 금리와 인수 규모를 지정해주고 이를 수용하는 증권사로만 주관사를 꾸린다는 게 업계 얘기다. 2013년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 도입 이전으로 시장이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산운용사도 비슷한 실정이다. 한 대형 운용사 채권운용팀장은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한 증권사가 시장금리 대비 0.15%포인트 이상 낮은 금리에 대거 주문을 내 기대한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낙찰받았다”며 “이제 회사채 수요예측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이 채권을 서로 비싸게 인수해주면서 손실을 키운 ‘랩·신탁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근 회사채 금리는 올해 두세 번의 기준금리 인하를 전제하고 형성돼 있다”며 “기준금리 인하가 기대에 못 미치면 채권 금리가 오르면서 회사채를 염가에 인수한 증권사들이 대규모 평가손실을 떠안아 자칫 시장 전반의 시스템 위기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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