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카펫 위를 걷는 건 걷는 이의 권위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고대에는 왕들만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중세시대엔 성직자의 길로 여겨지며 종교적 장치로 사용됐다. 근대에 와서는 국가의 권위를 보여줘야 하는 자리에 빠짐없이 등장했다.1920년대 영화산업이 태동하자 레드카펫은 스타들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는 1922년 할리우드 그로먼스차이니즈극장에서 열린 ‘더 로빈 후드’ 영화 시사회에서 처음 레드카펫이 등장했다. 아카데미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이 쓰인 건 1961년 제33회 시상식 때부터다. 전국에 방송이 중계되면서 스타들의 권위와 스타성을 더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스타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권력자로 등극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스타들은 다른 스타들에 밀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할 드레스가 필요했다. 드레스는 갈수록 과감해졌고, 기존 틀을 깨는 패션도 끊임없이 등장했다. 1966년 카트린 드뇌브가 드레스 대신 발목까지 오는 긴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어 반향을 일으킨 것도 그런 사례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레드카펫은 패션쇼와 같았다.
권력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레드카펫 위 스타들도 그랬다. 단순히 패션 드레스를 보여주는 걸 넘어 자신들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레드카펫을 이용했다. 주로 여배우들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성평등 그리고 환경 보호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냈다.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자 여배우들은 성폭력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블랙 드레스를 줄줄이 착용했다. 이를 통해 ‘미투 운동’ 지지를 표현했다. 그해 여배우들은 시상식마다 블랙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레드카펫 위 사회적 운동이 일어난 셈이었다. 2016년 레이디 가가가 보여준 성폭력 생존자에 대한 헌정 드레스의 맥락을 발전시킨 것이다. 당시 레이디 가가는 순백색 팬츠 슈트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했다.
2019년에도 여성의 당당함을 강조하는 패션이 주를 이뤘다. 샤를리즈 테론이 입은 디올의 블루 롱슬리브 드레스와 짧은 컷의 헤어스타일은 전통적인 여성 드레스와는 달랐다.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나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당한 앞모습과 달리 등은 크게 파인 디자인으로 관능적인 매력을 뽐냈다. 여성 스스로 자신의 스타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2020년에는 내털리 포트먼이 여성 감독들의 이름이 새겨진 디올 케이프를 입고 나왔다. 간접적인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오스카상 후보에 여성 감독들이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영화계에 여전한 성차별과 여성 감독 저평가 문제를 지적했다. 당시 큰 반향이 일었다. 스타들이 이런 식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내는 게 옳은 것이냐는 논쟁에 불이 붙었다. 영화계에서는 여성 감독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털리 포트먼이 실제론 여성 감독과 일하기를 꺼려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영향도 컸다. 강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는 오히려 대중적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레드카펫 위 메시지는 페미니즘에서 환경 문제로 옮겨갔다. 환경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스타는 많았지만 레드카펫에서 드레스로 메시지를 표현한 건 2020년 제인 폰다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는 6년 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입은 빨간색 엘리사브 드레스를 다시 입었다. 같은 드레스를 다시 입는 건 그동안 없던 일이었다. 새로운 옷을 소비하지 않고 기존 의상을 재활용하며 패션 과소비 문제를 지적했다.
올해는 별다른 사회적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고 친환경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이 살다나는 재활용 소재의 스텔라 매카트니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었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지속 가능한 소재를 활용하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올리비아 콜먼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지속 가능한 벨벳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어 주목받은 뒤 매년 시상식에서 스타들이 그의 드레스를 선택하고 있다.
티모테 샬라메도 비건 가죽으로 만든 밝은 노란색 턱시도를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동물성 가죽 사용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의상이란 분석이 나왔다.
그동안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무는 패션으로 주목받은 빌리 포터는 올해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든 볼 가운을 착용해 화제를 모았다. 패션의 성 구분을 없애는 ‘젠더 플루이드 패션’의 선구자인 만큼 도전적인 패션을 선보여 친환경 메시지를 담았단 평가다.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은 패션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으로 작동하고 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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